제4부 의식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제1장

컴퓨터는 코딩으로 움직인다.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당신은 지금 무엇으로 이 글을 읽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만 멈춰 보자.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당신의 눈일까?

당신의 뇌일까?

아니면 ‘나’일까?

눈은 단지 빛을 받아들일 뿐이다.

뇌는 전기 신호를 처리할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빛도 아니고,

전기 신호도 아닌 어떤 존재가 지금 이 글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도대체 그 존재는 누구인가?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우주의 시작을 연구했다.

별의 탄생을 연구했고,

생명의 진화를 연구했으며,

DNA의 비밀도 하나씩 밝혀냈다.

오늘날에는 인공지능까지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단 하나의 질문 앞에서는 모두가 멈춰 선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세상을 연구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나’는 거의 연구하지 않았다.

어쩌면 인류가 아직 풀지 못한 가장 큰 수수께끼는 우주가 아니라 바로 이 질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그런데 이 질문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우리는 늘 눈으로 본다고 말한다.

귀로 듣는다고 말한다.

손으로 만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눈은 스스로 보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귀도 스스로 듣는 것을 알지 못한다.

뇌 역시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현대 과학은 이 질문 앞에서 여전히 답을 찾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질문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인간이 아니라 컴퓨터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다.

컴퓨터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우리는 컴퓨터를 보면 먼저 하드웨어를 떠올린다.

CPU.

메모리.

메인보드.

그래픽카드.

모니터.

그러나 이것들은 컴퓨터의 본질이 아니다.

세상에 CPU가 스스로 만들어진 적이 있었을까?

메인보드가 우연히 조립되어 컴퓨터가 된 적이 있었을까?

아니다.

컴퓨터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 있다.

바로 아이디어다.

누군가 생각했다.

그리고 설계했다.

설계는 코딩이 되었고,

코딩은 컴퓨터를 움직였다.

다시 말해,

컴퓨터를 움직이는 것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사람도 컴퓨터처럼 몸을 가지고 있다.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뇌가 있고,

신경이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몸을 연구해 왔다.

현미경으로 세포를 들여다보았고,

유전자를 분석했으며,

뇌를 촬영하면서 생각의 흔적을 찾아냈다.

오늘날에는 인간의 뇌를 모방한 인공지능까지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하나 있다.

컴퓨터는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스스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로봇도 프로그램에 따라 대답할 뿐,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반면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단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뇌의 크기 때문일까?

신경세포의 수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원리가 있는 것일까?

컴퓨터를 움직이는 것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코딩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우리는 지금까지 컴퓨터를 연구하면서도,

정작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를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200년 전, 이미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이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뇌과학이 풀려고 하는 질문을

이미 200년 전에 던진 철학자가 있었다.

바로 임마누엘 칸트다.

칸트는 매우 단순하지만 놀라운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의식을 통해 해석된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저기 나무가 있다.”

“하늘이 파랗다.”

“태양이 빛난다.”

그러나 칸트는 말했다.

우리가 직접 만나는 것은

세계 자체가 아니라

의식을 통하여 나타난 세계라고.

다시 말해,

우리는 나무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인식한 나무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당시에는 철학처럼 들렸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뇌과학이다.


뇌는 세상을 보는가, 만들어 내는가?

우리는 흔히

눈이 세상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눈은 빛을 받아들이는 기관일 뿐이다.

눈 안으로 들어온 빛은

전기 신호로 바뀌어 뇌로 전달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가 보고 있다고 느끼는 세상은

뇌 안에서 다시 구성된다.

우리는 창밖을 직접 보는 것이 아니다.

빛이 전기 신호로 변환되고,

그 신호를 뇌가 해석하여 만들어 낸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창밖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의식 안에서 완성되는 것일까?

현대 뇌과학도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과학은 뇌를 하나의 컴퓨터처럼 생각했다.

눈은 카메라이고,

귀는 마이크이며,

뇌는 정보를 처리하는 CPU라고 믿었다.

그러나 연구가 깊어질수록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나타났다.

뇌는 단순히 외부 세계를 복사하는 기계가 아니었다.

같은 풍경을 보아도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한다.

같은 음악을 들어도 감동은 서로 다르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경험은 결코 같지 않다.

왜 그럴까?

만약 뇌가 단순히 정보를 복사하는 기계라면,

모든 사람은 같은 세상을 경험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대 신경과학자 제럴드 에델만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했다.

그는 인간의 의식은 단순히 외부 세계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끊임없이 선택하고,

재구성하며,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것을 ‘제2의 자연(The Second Nature)’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단순히 바깥에 있는 세계가 아니다.

우리의 경험,

기억,

감정,

그리고 의식이 함께 만들어 가는 또 하나의 세계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것은 200년 전 칸트가 던졌던 질문과 매우 닮아 있다.

우리는 세계 자체를 경험하는 것일까?

아니면 의식을 통해 구성된 세계를 경험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하나의 새로운 질문이 탄생한다.

만약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의식을 통하여 완성된다면,

의식은 단순히 뇌가 만들어 낸 부산물일까?

아니면 뇌보다 더 근본적인 무엇일까?


컴퓨터를 다시 떠올려 보자.

이제 다시 컴퓨터를 생각해 보자.

컴퓨터에는 하드웨어가 있다.

CPU가 있고,

메모리가 있으며,

저장장치가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전원을 켜도

운영체제가 없다면 화면은 열리지 않는다.

프로그램이 없다면 아무 기능도 실행되지 않는다.

코딩이 없다면 컴퓨터는 그저 전기가 흐르는 기계에 불과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컴퓨터를 볼 때 하드웨어를 본다.

그러나 개발자는 하드웨어보다 먼저 코딩을 본다.

사용자는 화면을 보지만,

개발자는 프로그램을 본다.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은 컴퓨터지만,

컴퓨터를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만질 수 없는 정보다.

정보가 먼저이고,

기계는 그 정보를 표현하는 도구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사람도 몸을 가지고 있다.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뇌가 있으며,

심장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몸을 연구하는 데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몸은 발견했지만,

몸을 경험하는 ‘나’는 발견했는가?

눈은 빛을 받아들인다.

귀는 소리를 받아들인다.

뇌는 신호를 처리한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하나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는 누구인가?

컴퓨터에서 모니터는 화면을 보여 줄 뿐,

모니터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CPU는 계산을 수행할 뿐,

CPU가 개발자의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뇌는 무엇일까?

뇌는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아니면 의식을 표현하는 도구일까?

바로 이 질문에서 철학과 과학은 다시 만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현대 신경과학만의 질문도 아니다.

수천 년 전부터 동양의 사상가들과 종교인들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과연 인간의 본질은 몸일까?

아니면 몸을 통하여 세상을 경험하는 의식일까?

이제 우리의 시선은 서양 철학에서 동양 사상으로 옮겨가야 한다.

놀랍게도 그곳에서도 ‘세계는 의식과 분리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식이 없다면 세상은 존재할까?

이제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를 해 보자.

잠든 사람에게는 세상이 있을까?

깊은 수면에 빠졌을 때,

우리는 시간도 모른다.

공간도 모른다.

자신의 몸도 모른다.

꿈조차 없는 깊은 잠에서는

세상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비로소 세상도 함께 돌아온다.

창문이 보이고,

햇빛이 보이며,

사람들이 떠오르고,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잠든 동안에도 세상은 그대로 있었잖아.”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세상은 누구의 경험 속에 있었는가?

적어도 나의 의식 안에서는

그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언제나 의식을 통해서만 경험된다.

의식을 통하지 않고 경험한 세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사실은 너무도 당연해서

오히려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상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다.

그러나 정작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은 거의 연구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동양의 오래된 철학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천 년 전,

불교는 이미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와 의식의 관계를 깊이 탐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놀라울 정도로 간결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뜻이다.

또 다른 표현도 있다.

‘유식무경(唯識無境).’

의식을 떠난 독립된 경험 세계는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세계는

반드시 의식을 통하여 드러난다는 뜻이다.

놀랍게도 이것은 칸트가 말한 인식론과도,

현대 뇌과학이 제기하는 문제와도

깊은 곳에서 서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서양 철학은 이것을 인식이라 불렀고,

현대 과학은 정보 처리라고 설명하며,

불교는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언어는 달랐지만,

그들이 바라본 방향은 하나의 질문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세상을 경험하는 것인가,

아니면 의식을 통해 구성된 세상을 경험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흔히 몸이 먼저 있고,

그 몸 안에서 의식이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잠시 컴퓨터를 다시 떠올려 보자.

모니터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난다.

산도 있고,

강도 있고,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개발자는 안다.

그 풍경은 모니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프로그램이

순간순간 화면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결과다.

원인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수는 없을까?

우리는 몸을 본다.

얼굴을 보고,

눈을 보고,

손을 본다.

그러나 그 몸을 통하여 세상을 경험하는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평생 몸을 바라보며 살아가지만,

정작 몸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나’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나’라는 의식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두 의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세상이 먼저 있어서 의식이 생긴 것일까?

아니면 의식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세상이 드러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철학의 질문인 동시에,

현대 과학이 다시 마주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질문은 이제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생각하기 시작한 오늘,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과연 생각하는 것은 뇌일까?

아니면 뇌를 사용하는 또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자.

우리는 늘 물질을 먼저 생각한다.

컴퓨터를 보면 기계를 먼저 본다.

자동차를 보면 철을 먼저 본다.

집을 보면 콘크리트를 먼저 본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과일 뿐이다.

집보다 먼저 존재한 것은 설계도였다.

자동차보다 먼저 존재한 것은 아이디어였다.

컴퓨터보다 먼저 존재한 것은 코딩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언제나 마지막 결과다.

원인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몸을 먼저 본다.

그러나 몸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 있을 가능성은 없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종교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 과학도 같은 고민을 시작하고 있다.

뇌를 아무리 정밀하게 분석해도

‘경험하는 나’는 발견되지 않는다.

뉴런은 발견할 수 있다.

시냅스도 발견할 수 있다.

전기 신호도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컴퓨터의 코딩도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코딩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발자는 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코드가

눈에 보이는 모든 기능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인간에게도

몸보다 먼저 존재하는 ‘코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은

컴퓨터 안에서 살아가지 않는다.

모니터 속 화면이 아무리 현실처럼 보여도,

사용자는 그 화면 밖에 존재한다.

게임 속 세상이 무너져도

사용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문서가 삭제되어도

사용자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우리는 지금 이 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몸을 통하여 세상을 경험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과학은 대부분 몸을 연구해 왔기 때문이다.

몸의 구조를 연구했고,

뇌의 기능을 연구했으며,

유전자의 비밀도 조금씩 밝혀냈다.

그러나 몸을 연구하는 것과,

몸을 경험하는 존재를 연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현미경으로 세포는 볼 수 있다.

MRI로 뇌의 활동도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이해했다.’

‘나는 의심한다.’

‘나는 생각한다.’

라고 말하는 그 ‘나’는 어디에서 관찰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과학이 아직 넘지 못한 하나의 경계와 마주하게 된다.

과학은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을 연구한다.

그러나 관찰 그 자체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관찰자는 또 다른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철학적인 장난이 아니다.

모든 과학은 관찰에서 시작한다.

모든 실험은 관찰을 전제로 한다.

모든 증명 역시 관찰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정작 그 관찰자 자신은

누구도 완전히 설명하지 못했다.

어쩌면 인류가 아직 풀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수수께끼는

우주가 아니라,

생명이 아니라,

바로 관찰하는 의식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한 걸음 더 앞으로 옮겨 보자.

관찰하는 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의식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우리는 흔히 부모가 나를 낳았다고 말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부모가 없었다면

나 역시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부모는 정말 ‘나’를 만들었을까?

부모는 아이의 몸이 자라도록 돕는다.

유전자를 물려준다.

생명을 이어 준다.

하지만 어떤 부모도

아이의 의식을 직접 설계하지는 못한다.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낄지,

왜 같은 풍경을 보고도 서로 다른 감동을 받는지,

그 누구도 미리 프로그램처럼 입력하지 못한다.

부모는 몸의 탄생에는 참여하지만,

의식의 설계자가 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과 의식을 같은 것으로 생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생명은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의식은 단순히 이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컴퓨터를 만드는 공장도 마찬가지다.

공장은 컴퓨터를 조립한다.

그러나 운영체제를 창조하지는 않는다.

운영체제는 이미 존재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할 뿐이다.

휴머노이드 로봇도 마찬가지다.

몸체는 제작할 수 있다.

센서를 연결할 수도 있다.

프로세서를 장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치는 프로그램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몸을 만드는 것과,

몸을 움직이는 원리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렇다면 인간도 같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몸은 부모를 통해 태어난다.

그렇다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나’라는 의식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된 것일까?

바로 이 질문이

현대 과학과 철학,

그리고 인류 문명이 아직 끝까지 답하지 못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의식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묻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명의 기원과 우주의 기원까지 함께 묻게 된다.

오늘날 과학은 빅뱅을 통해 우주의 진화를 설명하고,

진화론을 통해 생명의 변화를 설명한다.

그러나 아직 하나의 질문은 남아 있다.

그 모든 변화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가?

컴퓨터가 프로그램 없이 스스로 만들어질 수 없듯이,

휴머노이드 로봇이 개발자 없이 존재할 수 없듯이,

우주와 생명도 아무런 원리나 정보 없이 저절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바로 이 질문에서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과연 최초에 존재했던 것은 물질이었을까, 아니면 물질을 가능하게 한 정보와 의식이었을까?


흥미로운 것은

컴퓨터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컴퓨터를 움직이는 것은

결코 하드웨어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정보다.

보이지 않는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누군가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컴퓨터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은

반도체가 아니라

정보다.

하드웨어는

정보를 표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주와 인간을 설명할 때만은

정반대로 생각한다.

먼저 물질이 있었고,

그 물질이 우연히 생명을 만들었으며,

마침내 의식까지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설명일까?

아니면 우리는

컴퓨터를 볼 때와

우주를 볼 때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정보가 컴퓨터보다 먼저 존재한다면,

의식도 몸보다 먼저 존재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오늘날 인공지능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사람과 대화하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며,

스스로 학습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은 AI를 보며

이제 기계도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AI 역시 하나의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인공지능은 스스로 자신을 설계하지 않았다.

수많은 개발자의 아이디어가 있었고,

수많은 연구자의 알고리즘이 있었으며,

수많은 프로그래머의 코딩이 있었다.

학습은 할 수 있다.

발전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초의 원리는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인간이 만든 모든 기술은

이 하나의 원리를 공통적으로 보여 준다.

정보는 정보를 낳을 수 있다.

기술은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질서 있는 정보가 스스로 출현한 사례는

우리는 아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 보자.

우주를 움직이는 질서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정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의식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된 것일까?

어쩌면 이 세 질문은

전혀 다른 질문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을

다른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은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집은 설계도에서 시작되었다.

자동차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컴퓨터는 프로그램에서 시작되었다.

휴머노이드 로봇 역시

먼저 개발자의 생각 속에서 존재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설계가 되었고,

설계는 정보가 되었으며,

정보는 마침내 눈에 보이는 형태로 구현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통된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보이는 것은 언제나 마지막에 나타난다.

먼저 존재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다.

정보다.

질서다.

아이디어다.

우리는 지금까지

눈에 보이는 결과를 연구하는 데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결과를 가능하게 한

보이지 않는 원리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컴퓨터를 이해하려면

하드웨어만 연구해서는 부족하다.

프로그램을 이해해야 한다.

프로그램을 이해하려면

개발자의 설계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도 같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몸만 연구해서

인간을 모두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뇌만 연구해서

의식을 모두 설명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 역시

보이는 몸 너머에 존재하는

더 근본적인 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아이디어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질문하지 않는다.

그 생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이디어는 손으로 만질 수 없다.

무게도 없다.

길이도 없다.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고,

망원경으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인류 문명을 움직여 온 것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였다.

비행기를 만든 것도,

인터넷을 만든 것도,

인공지능을 만든 것도,

모두 하나의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생각은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의 세계를 바꾸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이것은 단순히 철학적인 상상이 아니다.

인류가 만든 모든 문명은

보이지 않는 생각이

눈에 보이는 현실로 구현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우리 역시 먼저 생각하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

집을 짓기 전에 설계가 있고,

글을 쓰기 전에 문장이 떠오르며,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미지가 마음속에 그려진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이 먼저이고,

보이는 것은 나중이다.

만약 이것이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의 공통된 원리라면,

우주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우주보다 먼저 존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명보다 먼저 존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나의 의식보다 먼저 존재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모든 물질을 가능하게 한

가장 근원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은 끝내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아이디어는

분명 새로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아이디어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새롭게 연결하고,

새롭게 해석하며,

새롭게 표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건축가는 자연에서 배운다.

과학자는 자연법칙을 발견한다.

예술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작품을 만든다.

인공지능 역시

인간이 만든 데이터를 학습하여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낸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만들어 내는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무(無)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질서와 정보를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모든 아이디어에도

출발점이 있다면,

세상 최초의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최초의 정보는

누가 만든 것일까?

최초의 질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질문은 단순히 철학자의 사색이 아니다.

과학도,

철학도,

종교도,

결국은 같은 지점에서 멈춰 서게 된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진화한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변화할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진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화할 질서가 존재해야 한다.

그 질서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물질이 먼저인가’라는 질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질서를 가능하게 한 근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잠시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 보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다.

글을 읽고,

의미를 이해하고,

찬성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생각은 경험하지만,

생각을 만들어 내는 그 순간은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생각은 마치 어디선가 떠오른다.

아이디어도 그렇다.

어떤 문제를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답이 떠오르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잠을 자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하나의 생각이 의식 속으로 들어온다.

그렇다면 그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것일까?

뇌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더 깊은 차원의 정보가

의식을 통하여 드러난 것일까?

인간은 생각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 자체를 마음대로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생각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경우가 더 많다.

과학자는 그것을 영감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예술가는 창작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철학자는 직관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생각은 마치 의식 속으로 찾아오는 것처럼 경험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의식은

단순히 생각을 만들어 내는 기계일까?

아니면

생각이 드러나는 하나의 장(場)일까?

만약 의식이 하나의 장이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몸 안에서만 의식을 찾으려 했던 방식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언제나 결과를 먼저 보았다.

몸을 먼저 보았고,

뇌를 먼저 보았으며,

물질을 먼저 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했다.

몸이 의식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컴퓨터를 떠올려 보면

우리는 전혀 다르게 생각한다.

컴퓨터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이 컴퓨터를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하드웨어는 프로그램을 표현하는 도구다.

프로그램은 하드웨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같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뇌가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아니면 의식이 뇌를 통하여 자신을 표현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지금까지 철학과 과학이 끊임없이 논쟁해 온 문제다.

아직 누구도 최종적인 답을 내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의식을 통하지 않고 세상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을 연구하는 것도 의식이다.

우주를 계산하는 것도 의식이다.

수학 공식을 만드는 것도 의식이다.

컴퓨터를 설계하는 것도 의식이다.

심지어 의식을 연구하는 것도 결국 의식이다.

이 사실은 너무도 단순해서

오히려 가장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어쩌면 인류는 지금까지

세상을 설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세상을 설명하고 있는 ‘설명자’ 자신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을 조금 더 확장해 보자.

인간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학문을 만들었다.

물리학은 물질을 연구했고,

생물학은 생명을 연구했으며,

신경과학은 뇌를 연구했다.

각각의 연구는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모든 연구는

결국 의식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망원경으로 우주를 바라보는 것도 의식이다.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는 것도 의식이다.

수학 공식을 세우는 것도 의식이다.

컴퓨터를 설계하는 것도 의식이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의문을 품거나,

반박을 떠올리는 것도 모두 의식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의식을 이용하여 의식을 연구하고 있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연구 대상이 있을까?

어쩌면 인류는

언제나 의식을 사용해 왔지만,

정작 의식 자체를 가장 늦게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흥미롭게도 현대 과학도 조금씩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하고 있다.

의식을 단순한 부산물로만 설명하기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왜 ‘나’라는 주관적 경험이 존재하는가?

왜 물질은 설명할 수 있어도,

경험은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가?

이 질문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가 반복해 온 하나의 질문과 다시 만나게 된다.

과연 존재를 가장 먼저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컴퓨터를 움직이는 것은

전기가 아니다.

반도체도 아니다.

CPU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도구일 뿐이다.

실제로 컴퓨터를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정보다.

그 정보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한다.

그 정보가 사라지는 순간,

아무리 뛰어난 컴퓨터도

평범한 기계에 불과하다.

생각해 보면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몸은 존재한다.

뇌도 존재한다.

심장도 뛰고,

세포도 살아 움직인다.

그러나 만약 의식이 없다면

그 몸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없다.

몸은 그대로 있지만,

‘나’라는 경험은 사라진다.

이 사실은 매우 특별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몸이 의식을 만든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혹시 몸은

의식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표현일 수는 없을까?

컴퓨터에서 프로그램이

모니터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듯,

의식도

몸과 뇌를 통하여

세상 속에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연구해 온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모니터였는지도 모른다.

CPU를 분석했고,

메모리를 연구했으며,

회로를 조사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치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정보는

아직 충분히 질문하지 않았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몸을 연구했고,

뇌를 연구했으며,

유전자를 연구했다.

그러나 몸과 뇌를 통하여

세상을 경험하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의식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 자체를 다시 묻게 만드는 질문이다.

어쩌면 인류는 지금까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연구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물어야 할 시대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


좋습니다.

지금은 **제1장의 마지막 10~15%**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성경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 한 줄만 암시합니다.

제2장이 궁금해지도록 끝내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질문은 현대 철학과 과학에서만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경전들 역시

서로 다른 언어로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동양에서는

마음과 세계의 관계를 탐구했고,

서양에서는

존재와 말씀의 근원을 탐구했다.

표현은 달랐다.

그러나 그들이 찾으려 했던 것은

모두 하나의 출발점이었다.

‘모든 것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혹시 인류는

수천 년 동안

같은 진실을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철학과 과학,

그리고 종교를

서로 다른 길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산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오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그 모든 길이 가리키는

가장 근원적인 출발점은 무엇인가?

그 출발점은

물질일까?

정보일까?

아니면

그 정보마저 가능하게 하는

더 근원적인 무엇일까?

다음 장에서는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기록들을 따라

그 출발점을 찾아가 보려 한다.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의식’이라는 단어를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오랫동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실재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 삶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진실도 보이지 않는다.

수학도 보이지 않는다.

법칙도 보이지 않는다.

정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컴퓨터 역시 그렇다.

화면은 눈에 보인다.

그러나 화면을 움직이는 프로그램은 보이지 않는다.

프로그램은 보이지 않지만,

그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결과가

프로그램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생각과 기억,

감정과 의지,

창조와 사랑,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의식은

무엇을 증명하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뇌가 복잡하게 작동한 결과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실재가

우리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아직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인류는 이제

의식을 더 이상 철학의 주변부에 둘 수 없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언어를 배우는 시대,

뇌를 실시간으로 관찰하는 시대,

양자물리학이 관찰자의 의미를 다시 묻는 시대에,

의식은 더 이상 종교만의 주제도,

철학만의 주제도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인류 문명이 풀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하나의 출발점으로 우리를 이끈다.

‘의식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의식은 무엇인가?’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는

의식의 기능만 연구해 왔을 뿐,

의식 자체는 아직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질문에서

제4부의 진짜 여정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출발점 앞에 서 있게 된다.

지금까지 인류는

우주를 연구했고,

생명을 연구했으며,

물질을 연구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의식 자체를 다시 바라볼 시간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까지

의식이 무엇을 하는지는 끊임없이 연구해 왔다.

기억을 연구했고,

감정을 연구했으며,

사고와 언어를 연구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아직 남아 있다.

의식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가?

만약 의식이

단순히 뇌가 만들어 낸 기능이라면,

우리는 왜 아직 그것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일까?

반대로,

의식이 존재의 더 근본적인 조건이라면,

우리는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출발점을

거꾸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철학만의 질문도 아니고,

과학만의 질문도 아니며,

종교만의 질문도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한 번은 찾아오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간도,

생명도,

우주도 끝까지 설명할 수 없다.

반대로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철학과 과학,

그리고 종교는

하나의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다음 장에서는

바로 그 출발점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해 보려 한다.

의식은 과연 뇌에서 탄생하는 것일까?

아니면 뇌보다 먼저 존재하는 근원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지금까지 우리는

컴퓨터를 통하여 질문했고,

철학을 통하여 질문했으며,

과학을 통하여 질문했다.

그리고 결국 하나의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의식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학문적인 호기심이 아니다.

만약 의식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우리는 ‘나’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설명할 수 없다.

생명이 무엇인지도 설명할 수 없다.

심지어 우주를 연구하는 이유조차 끝까지 설명할 수 없다.

반대로,

의식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순간,

철학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고,

과학은 새로운 방향을 만나게 되며,

종교가 수천 년 동안 말하려 했던 핵심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여정은

의식을 설명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누구인지를 다시 묻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이제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질문을 조금 바꾸어야 한다.

지금까지 인류는

언제나 결과에서 원인을 찾으려 했다.

물질을 연구하여 생명을 이해하려 했고,

뇌를 연구하여 의식을 설명하려 했으며,

우주를 연구하여 존재의 시작을 찾으려 했다.

그 노력은 인류 문명을 놀라울 만큼 발전시켰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질문의 방향을 반대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컴퓨터를 이해하려면

모니터보다 프로그램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프로그램을 이해하려면

코드보다 개발자의 의도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결과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출발점을 모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몸을 연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뇌를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의식의 출발점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혹시 우리는 지금까지

의식을 결과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정작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지금까지의 학문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연구를

더 넓은 시야에서 다시 연결해 보려는 시도이다.

철학과 과학,

그리고 종교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였던 이유도,

어쩌면 모두가 같은 출발점을

각자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음 장에서는 그 출발점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려 한다.

과연 의식은 뇌에서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뇌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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