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제8부 제2장에서 우리는 창세기 1장과 사도행전 17장을 함께 놓고 조금 낯선 질문을 던졌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모두 같은 창조를 말하고 있는가?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며, 인류와 여러 민족의 역사를 이루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생각해 온 것처럼 창세기 1장 창조 역시 우주와 지구, 식물과 동물, 그리고 생물학적 최초 인류가 만들어진 과정을 설명하는 기록일까요?
이번 장에서는 처음부터 답을 정해놓지 않겠습니다.
대신 창세기에서 사용된 빛과 어둠, 해와 달과 별, 씨와 나무와 열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성경이 성경을 설명하도록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보이지 않았던 창세기 1장의 또 다른 모습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창세기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우리는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물질 우주가 존재하기 시작한 절대적인 최초 순간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태초’라는 표현이 등장한다고 해서 언제나 현대 우주론이 묻는 물질 우주의 최초 시점만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역시 놀랍도록 비슷한 언어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1
그리고 요한은 곧 말씀과 생명, 빛과 사람을 연결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4
여기에서 첫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이 말하는 ‘시작’은 언제나 물질 우주의 최초 순간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역사와 질서의 시작 역시 창조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까요?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이 질문을 가지고 창세기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2. 혼돈과 공허와 흑암
창세기 1장 2절에는 중요한 세 표현이 등장합니다.
혼돈, 공허, 흑암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창세기 1:2
자연 창조의 관점에서 읽으면 아직 세계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두웠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계속 읽다가 예레미야 4장 23절에 이르면 놀랍도록 낯익은 표현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땅을 바라보며 그것이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말하고, 하늘에는 빛이 없다고 묘사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보고 있는 것은 우주가 처음 만들어지기 전의 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사람도 있었고 성읍도 있었던 세계가 심판으로 황폐해지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단서입니다.
적어도 성경 안에서 ‘혼돈과 공허, 빛이 없음’이라는 표현은 물질 우주의 탄생 순간에만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창세기에서도 이 표현을 자연현상만으로 읽어야 하는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 흑암은 단순히 햇빛이 없는 상태인가?
이제 ‘흑암’과 ‘빛’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창세기에서 흑암 가운데 하나님의 첫 명령이 울립니다.
“빛이 있으라.”
자연현상으로만 읽으면 어두웠던 세계에 물리적인 빛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빛과 어둠을 찾아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사야 9장에서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4장은 이 예언을 예수의 갈릴리 사역과 연결합니다.
요한복음 1장은 생명을 사람들의 빛이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는 사람들을 빛의 아들, 낮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밤과 어둠을 그 반대편에 둡니다.
따라서 한 가지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빛과 어둠은 자연현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상태와 생명, 진리,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역사를 표현하는 언어로도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 역시 처음부터 물리적인 빛으로만 제한해서 읽어야 할까요?
4. 그런데 태양보다 빛이 먼저 등장한다
여기서 창세기 자체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빛은 첫째 날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빛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해와 달과 별에 해당하는 광명체들은 넷째 날에 등장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여러 전통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태양 이전에 다른 형태의 물리적 빛이 존재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그것을 반박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빛’이 생명과 진리, 그리스도와 사람의 상태를 나타내는 언어로 반복해서 사용된다면,
창세기의 빛을 천문학적인 빛으로만 한정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장 “창세기의 빛은 이것이다”라고 정답을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빨리 현대 자연과학의 의미를 창세기 속으로 집어넣고 있지는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5. 창세기 1장 창조를 성경이 설명하게 하자
여기서 이번 장의 중요한 원칙이 생깁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표현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반복된다면, 그곳에서 그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함께 살펴보자.
모든 것을 억지로 상징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물질적인 대상으로 고정하지도 말자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
해와 달과 별.
씨와 나무와 열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
이 단어들을 성경 전체에서 따라가다 보면 창세기 1장의 이야기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6. 해와 달과 별은 언제나 천체만을 의미할까?
창세기 1장 넷째 날에는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 그리고 별들이 등장합니다.
자연 창조의 관점에서 읽으면 천체의 창조입니다.
그런데 같은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은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꿉니다.
야곱은 이것을 실제 천체들이 절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과 가족에 관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같은 창세기 안에서도 해와 달과 별이라는 이미지가 사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언어로 사용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더욱 분명한 사례가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 1장 20절은 일곱 별의 의미를 본문 안에서 직접 설명합니다. 이곳의 별은 물리적인 항성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창세기 1장의 해와 달과 별 역시 반드시 사람을 뜻한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천체 언어를 언제나 문자적인 천문학으로만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창세기 1장을 성경 전체의 언어 안에서 다시 조사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7. 씨와 나무와 열매는 식물 이야기로 끝나는가?
창세기 1장에는 씨와 나무와 열매가 등장합니다.
자연 창조의 관점에서는 식물의 탄생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놀랍도록 자주 씨와 나무와 열매의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씨와 말씀의 관계가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작은 겨자씨에서 시작하여 자라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시고 사람들을 가지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창세기에 등장했던 생명나무가 다시 나타납니다.
성경의 처음에 등장했던 나무가 성경의 마지막에 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씨와 나무와 열매는 식물학적인 의미만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아직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창세기의 단어들이 성경 전체에서 서로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8. 모든 창조의 마지막에 사람이 등장한다
창세기 1장의 전체 흐름을 조금 멀리서 바라보겠습니다.
빛이 나타납니다.
빛과 어둠이 나뉩니다.
물과 땅이 나뉩니다.
씨와 나무가 등장합니다.
광명체와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앞의 창조물과 다른 특별한 표현이 붙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 1:26
창세기 1장의 절정에는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의 등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는 지구의 완성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일까요?

9. 인간의 기원과 하나님의 형상은 같은 질문인가?
과학은 인간의 육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연구합니다.
화석과 유전자를 조사하고, 오래된 인류의 이동과 생물학적 변화를 추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의 생물학적 역사를 깊이 연구하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두 질문을 구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와 종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은 무엇인가?
두 질문은 반드시 동일한 질문일까요?
만약 과학과 성경이 처음부터 서로 다른 차원의 질문을 추적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하나의 시간표 위에 겹쳐놓고 필요 이상으로 충돌시켜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과학이 오래된 인류의 역사를 발견했다고 해서 성경이 반드시 무너지는 것도 아니며,
성경을 믿기 위해 과학이 발견한 자연과 인류의 긴 역사를 반드시 부정해야 하는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10. 창조의 이야기는 말씀과 관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창세기 2장과 3장으로 넘어가면 이야기의 중심이 달라집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한 명령이 주어지고 사람은 그 말씀 앞에서 선택합니다.
이제 성경의 관심은 단순히 무엇이 만들어졌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라는 문제로 이동합니다.
성경을 계속 읽으면 이 구조가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말씀을 주시고,
언약을 세우시며,
사람은 그 말씀 앞에서 선택합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도 이미 여러 민족이 존재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이 특별한 언약의 관계로 부름받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창조와 언약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깊게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1. 그렇다면 성경은 왜 필요한가?
여기에서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성경은 왜 우리에게 주어졌을까요?
단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일까요?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라고 알려주는 것만이 성경의 최종 목적일까요?
물론 믿음과 기도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라면 성경에 기록된 이 거대한 이야기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창조가 필요합니까?
왜 하나님의 형상이 등장합니까?
왜 언약이 필요합니까?
왜 선지자들은 예언합니까?
왜 예수는 새 언약을 말씀합니까?
왜 성경은 구원과 거듭남을 이야기합니까?
그리고 왜 성경의 마지막에는 다시 새 하늘과 새 땅과 생명나무가 등장합니까?
이 모든 기록에는 시작에서 마지막을 향해 움직이는 하나의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12. 하나님의 형상에서 회복의 이야기로
창세기 1장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관계는 무너집니다.
그 이후 성경에는 언약이 등장합니다.
언약이 깨어지고,
다시 약속이 주어지며,
선지자들의 예언이 이어지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새로운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구원이라는 말 역시 단순히 “죽은 뒤 좋은 장소에 간다”는 문제만으로 축소하기 어렵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회복되는가?
이 관점에서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은 성경 첫 장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표현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방향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13. 그렇다면 천국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사용해 온 또 하나의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천국,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천국을 죽은 뒤 영혼이 가는 장소부터 떠올립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는 방법은 훨씬 풍성합니다.
마태복음 13장 31~32절에서는 천국을 아주 작은 겨자씨에 비유합니다.
작은 씨가 자라 큰 것이 되고 나무가 됩니다.
즉,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자라고 변화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사람과 아무 관계가 없는 먼 공간에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변화되는 사람과 공동체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 역시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앞으로 별도의 장에서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창세기의 씨와 나무,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됩니다.
14. 창세기의 오해는 단순한 연대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창조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지구의 나이가 6천 년인가 수십억 년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창세기가 본래 말하려는 중심을 놓치고 자연과 인류의 물질적 창조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한다면 우리는 성경이 인간에게 던지는 더 큰 질문을 놓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만들고자 하셨는가?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무너졌는가?
왜 언약이 반복되는가?
왜 예언이 필요한가?
왜 구원이 필요한가?
왜 성경의 마지막에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하는가?
따라서 창세기를 어떻게 읽느냐는 단순한 지식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잘못된 질문에만 매달리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목적과 소망 자체를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단지 오래전 하나님께서 자연과 인간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이라면 우리는 그 사건의 관람객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떤 존재로 만들고자 하시는지, 무너진 사람이 어떻게 회복되는지, 그리고 그 역사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경은 과거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변화되어야 하는가?
15. 창세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소망으로 끝난다
이제 성경의 마지막으로 가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이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절망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하며 눈물과 사망과 애통과 아픔이 사라지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더욱 흥미롭게도 성경의 처음에 등장했던 생명나무가 다시 나타납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성경의 마지막에서 다시 생명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성경을 다시 읽는 이유,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읽으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과거의 창조 사건을 더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한 소망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과 아픔과 죽음이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라면 성경의 긴 이야기는 결국 과거의 기록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현재의 인간 상태가 마지막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고,
성경의 긴 역사를 통해 언약과 구원과 회복을 이야기하며,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하고 눈물과 죽음과 고통이 사라지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은 처음에 무엇을 창조하려 하셨으며, 마지막에는 무엇을 완성하려 하시는가?
이 관점에서 창세기를 다시 읽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해석을 수정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미래를 다시 발견하는 일입니다.
창세기의 의미를 자연과 인류의 물질적 창조에만 가두어 버린다면 창조 연대를 잘못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목적과 하나님 나라, 생명과 회복에 대한 소망까지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조금 더 관심 있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익숙한 해석만 반복하기보다 한 구절을 다른 구절과 연결하고, 창세기에서 시작된 말씀이 예언서와 복음서를 지나 요한계시록에서 어떻게 다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학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기존의 신앙을 공격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과학에는 자연과 인류의 역사를 연구할 자리를 돌려주고, 성경에는 성경이 말하려는 목적을 다시 돌려주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성경의 소망을 다시 발견해 보자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빛, 생명, 하나님의 형상, 씨와 나무의 이야기가 어떻게 성경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지 앞으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남기겠습니다.
창세기의 창조는 오래전에 끝난 사건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서 완성하고자 하시는 창조의 시작일까요?
이 질문을 가지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관련 글
먼저 읽으면 좋은 글
제1부 제2장
성경에는 두 개의 창조가 있는가? 창세기 1장과 사도행전 17장
자주 묻는 질문 FAQ
창세기 1장은 과학적인 창조 기록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이 글은 처음부터 그렇게 단정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이 현대 자연과학이 묻는 질문과 정확히 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록되었는지를 성경 전체의 언어를 통해 다시 검토하자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빛은 예수님이라는 뜻인가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빛은 생명, 진리, 그리스도와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창세기 1장의 빛을 곧바로 예수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빛을 물리적 빛으로만 제한하기 전에 성경 전체의 용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해와 달과 별은 사람을 의미하나요?
창세기 37장의 요셉의 꿈과 요한계시록 등에서는 천체 이미지가 사람이나 다른 존재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그렇다고 창세기 1장의 모든 천체가 반드시 사람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 자체에 상징적인 천체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해석의 단서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왜 중요한가요?
창세기 1장의 인간 창조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표현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따라서 생물학적 인간의 기원과 별도로 성경이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을 말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연결되어 있나요?
창세기에서 등장하는 생명나무가 요한계시록 22장에서 다시 등장하며, 요한계시록 21~22장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하는 새로운 세계를 묘사합니다. 이런 처음과 마지막의 대응은 성경의 창조와 회복이라는 주제를 연구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 영상으로 함께 살펴보기
이 글은 YouTube **「K-Philosophy: World Re-interpretation」**에서 영상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사도행전 17장, 성경과 과학,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기원에 관한 질문을 글보다 더 많은 이미지와 설명을 통해 차근차근 살펴봅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창세기는 정말 성경이 말하려던 창세기였을까요?
창세기에서 시작된 빛과 생명,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요한계시록 21·22장이 보여주는 회복과 소망까지 함께 추적해 보겠습니다.
▶ YouTube: K-Philosophy: World Re-interpret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