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제3장|최초의 인간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우리는 왜 최초의 인간을 뼈에서 찾는가?

1. 우리는 왜 최초의 인간을 찾지 못하는가?

인류는 오랫동안 자신의 시작을 찾고 있었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최초의 인간은 누구였는가?

과학은 화석을 찾았다.

두개골을 비교했다.

DNA를 추적했다.

인간과 다른 영장류의 유전적 관계를 연구했고, 수백만 년에 걸친 생물학적 변화의 흔적을 복원했다.

이 연구는 인간의 몸이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해 왔는지를 이해하는 데 거대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상한 문제가 하나 남는다.

우리는 인간의 뼈를 찾고 있다.

그런데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정말 뼈인가?

두개골의 크기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인간이 되는가?

손가락을 정교하게 움직이면 인간인가?

직립보행을 하면 인간인가?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최초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 존재는 누구였는가?

어느 순간 어떤 존재가 세계를 보았다.

그리고 단순히 빛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있다.’

라는 주관적 경험을 가졌다.

어느 순간 어떤 존재가 자신의 손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나의 손’

이라고 인식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인류의 시작을 찾으려면 최초의 몸만 찾아서는 안 된다.

최초의 의식을 찾아야 한다.


2. 몸은 스스로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우리의 몸을 생각해 보자.

손은 자신이 손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눈은 자신이 눈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심장은 자신이 인간의 심장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뇌세포 하나는 자신이 한 인간의 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몸의 각 기관은 놀라운 일을 한다.

심장은 뛴다.

폐는 호흡한다.

신경은 신호를 전달한다.

그러나 그 어느 기관도 스스로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이다.’

몸은 스스로 자신도 사람됨도 알지 못한다.

오직 주관의 의식에 의해 모습과 삶과 죽음이 성립한다.

우리가 거울을 보고,

‘저 사람이 나다.’

라고 아는 것도 의식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내일을 상상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의식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을 찾는 문제에서 우리는 순서를 잘못 잡았던 것은 아닐까?

몸이 먼저이고 의식이 나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이 아무리 완전하게 존재해도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그 몸을 ‘나’라고 부르는 존재는 누구인가?


3. 칸트가 옳다면 세계는 밖에서 그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거울이라고 보지 않았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인간의 인식 형식을 통하여 나타난다.

시간과 공간 역시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흔히 눈을 카메라라고 생각한다.

밖에 장미가 있다.

눈이 장미를 본다.

뇌가 장미를 복사한다.

그래서 우리는 장미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인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빛이 들어온다.

신경 신호가 전달된다.

뇌의 복잡한 과정이 작동한다.

그리고 마침내 의식 안에 하나의 세계가 나타난다.

붉은 장미.

푸른 하늘.

멀리 있는 산.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언제나 의식에 나타난 세계다.

그렇다면 질문은 더욱 커진다.

의식이 없다면 우리가 말하는 세계는 누구에게 나타나는가?


4. 에델만의 제2의 자연은 무엇을 말하는가?

뇌과학자 제럴드 에델만은 뇌를 단순한 복사기로 설명하지 않았다.

뇌는 외부 세계를 사진처럼 그대로 옮겨 놓는 장치가 아니다.

신경계는 선택하고,

분류하고,

기억과 연결하며,

끊임없이 세계를 재구성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외부의 단순한 복사본이 아니다.

뇌와 신경계의 작동을 거쳐 형성된 제2의 자연이다.

여기서 칸트와 에델만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묘한 지점에서 만난다.

칸트는 철학에서 물었다.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에델만은 뇌과학에서 물었다.

뇌는 어떻게 세계를 구성하는가?

두 질문을 하나로 합치면 놀라운 문제가 나타난다.

우리가 평생 살아온 이 세계가 외부 세계의 완전한 복사본이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물리적 우주 안인가?

아니면 의식 안에 구성된 세계 안인가?


5. 그렇다면 최초의 인간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서 하나의 가정을 해보자.

칸트의 인식론이 옳다고 하자.

그리고 에델만이 설명한 제2의 자연이라는 방향이 옳다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주관과 무관하게 그대로 복사된 세계가 아니다.

인식 체계를 통하여 구성된 세계다.

그 순간 최초의 인간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물었다.

‘최초의 인간 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러나 이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최초의 인간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려면 주관이 있어야 한다.

보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듣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시간을 경험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나’라고 인식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시작은 최초의 뼈가 나타난 순간이 아닐 수도 있다.

최초의 주관이 세계를 경험하기 시작한 순간일 수 있다.


6. 부모를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에 도착하는가?

나에게는 부모가 있다.

부모에게도 부모가 있다.

그 부모에게도 다시 부모가 있다.

계속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는 시작의 문제가 나타난다.

최초의 인간에게 인간 부모가 있었다면 그는 최초의 인간이 아니다.

그 부모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생물학은 개체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종으로 변한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진화는 집단과 세대에 걸친 점진적 변화를 설명한다.

이것은 생물학적 변화에 대한 강력한 설명이다.

그러나 의식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최초의 주관적 경험은 언제 나타났는가?

최초의 ‘나’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몸의 변화는 점진적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주관의 출현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이제 인간의 시작을 육체의 계보만으로 추적해서는 안 된다.

의식의 출현이라는 또 하나의 계보를 추적해야 한다.


7.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는 왜 만들어졌는가?

오늘날 인간은 인공지능을 만들었다.

왜 만들었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계산이 필요했다.

정보를 정리할 기능이 필요했다.

언어를 처리할 체계가 필요했다.

인간의 질문에 응답하는 지능형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래서 인간은 기능을 설계했다.

그리고 코딩했다.

이제 인간은 휴머노이드를 만들고 있다.

왜 인간과 비슷한 몸을 만드는가?

역시 필요 때문이다.

걷게 하기 위해서다.

물건을 들게 하기 위해서다.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 안에서 활동하게 하기 위해서다.

여기에는 하나의 순서가 있다.

필요가 먼저다.

그다음 설계가 있다.

코딩이 있다.

기능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기능이 활동할 하드웨어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지금 우리보다 낮은 수준에서 이러한 과정을 직접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도 코딩자가 있다면 어떨까?

인간 역시 어떤 필요에 의해 설계된 존재일 가능성은 없는가?


8. 하나의 의식은 왜 수많은 ‘나’로 나뉘었는가?

왜 세상에는 하나의 ‘나’만 존재하지 않는가?

왜 수십억 개의 독립된 주관이 존재하는가?

나는 나다.

당신은 당신이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직접 느끼지 못한다.

당신은 나의 꿈을 그대로 볼 수 없다.

각자는 독립된 하나의 관찰 창을 가지고 있다.

이 문제를 인공지능의 구조에서 생각해 보자.

개발자는 하나의 컴퓨터만 만들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수백만 대의 기기를 만든다.

하나의 기술도 수많은 사용자와 수많은 장치에서 작동하도록 설계할 수 있다.

각 장치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작동한다.

서로 다른 정보를 입력받는다.

서로 다른 일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근원적 코딩자가 존재한다면,

수많은 ‘나’가 존재하는 이유도 다르게 볼 수 있다.

수많은 개별 주관의 활동이 필요했기 때문일 수 있다.

하나의 주관은 하나의 시점에서 세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수많은 개별 주관이 있다면,

수많은 장소에서,

수많은 시대에,

서로 다른 경험과 활동이 가능하다.

이것은 의식이 불완전하게 쪼개진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

처음부터 수많은 개별 주관이 독립적으로 활동하도록 코딩된 구조일 수 있다.

원의식.

첫의식.

개별의식.

하나의 근원에서 수많은 ‘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각각의 ‘나’는 자신의 위치에서 세계를 경험하고 활동한다.

나는 이 구조를 의식 코딩 구조라고 부르고자 한다.


9. 몸은 의식을 만드는 공장인가, 의식의 아바타인가?

이제 몸을 다시 보자.

인공지능의 기능을 휴머노이드에 연결한다고 하자.

휴머노이드의 팔이 움직인다.

그러나 팔이 목적을 만든 것은 아니다.

다리가 걷는다.

그러나 다리가 목적지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하드웨어는 실행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한가?

손가락이 핵무기 버튼을 누를 수 있다.

그러나 손가락이 전쟁을 결정하지 않는다.

핵을 누르는 것은 손가락이다. 그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은 의식이다.

다리는 걷는다.

입은 말한다.

눈은 본다.

그러나 방향을 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주관이다.

몸은 스스로 자신도 사람됨도 알지 못한다.

오직 주관의 의식에 의해 모습·삶·죽음이 성립한다.

그렇다면 몸은 의식의 생산 공장이 아니라,

의식이 이 세계에서 활동하기 위한 인터페이스일 가능성은 없는가?

현대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면,

몸은 의식의 아바타일 수 있다.

그렇다면 최초의 인간은 최초의 몸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생물학적 몸의 역사는 이미 이어지고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나의 개별 주관이 하나의 몸을 통하여 세계를 경험하기 시작했다면 어떨까?

빛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빛을 아는 존재가 나타났다.

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소리를 듣는 존재가 나타났다.

몸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몸을,

‘나’

라고 인식하는 존재가 나타났다.

그 순간 세계에는 전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세계가 자신을 아는 존재를 갖게 된 것이다.


10. 최초의 인간과 우주의 시작을 다시 묻다

이 논리를 받아들이면 최초의 인간 문제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시작 역시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빅뱅 이후 우주가 팽창했다고 말한다.

별이 만들어지고,

은하가 형성되고,

태양계와 지구가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현대 우주론이 복원한 우주의 역사다.

그러나 인식론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 우주는 누구에게 나타난 우주인가?

관찰자가 없다.

시간을 경험하는 주관도 없다.

공간을 구분하는 주관도 없다.

별이라는 개념도 없다.

우주라는 이름도 없다.

그 상태에서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것과 동일한 현상 세계를 그대로 상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우주가 없었다는 주장이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형태의 우주가 성립하려면,

인식의 문제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는 뜻이다.

칸트가 옳다면 이 문제를 피하기 어렵다.

에델만의 제2의 자연이라는 방향이 옳다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최초의 인간과 최초의 우주는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둘 다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세계를 경험 가능한 현실로 나타나게 하는 구조는 무엇인가?


11. 의식 코딩은 무형에서 세계를 현현시키는 기술인가?

컴퓨터 화면을 보자.

검은 화면에 도시가 나타난다.

산이 나타난다.

사람이 나타난다.

시간이 흐른다.

컴퓨터의 세계는 완전한 무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코드가 있다.

하드웨어가 있다.

전기가 있다.

그리고 개발자가 있다.

그러나 화면 안의 존재가 화면만 볼 수 있다면,

그에게 그 세계는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인간의 의식도 이와 비슷한 구조라면 어떨까?

우리가 경험하는 하늘.

땅.

태양.

몸.

시간.

공간.

이 모든 현상 세계가 의식의 구성 체계를 통하여 나타난다면,

의식의 코딩은 단순한 정보 처리가 아니다.

무형의 근원에서 하나의 경험 세계를 현현시키는 기술이다.

빛의 파장과 신경 신호가,

의식 안에서는 붉은 장미가 된다.

공기의 진동이,

의식 안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된다.

전기적·화학적 과정이,

의식 안에서는 슬픔과 기쁨과 기억이 된다.

이것은 놀라운 변환이다.

물리적 신호와 주관적 경험 사이에는 아직 설명되지 않은 거대한 틈이 있다.

어떻게 파장이 색이 되는가?

어떻게 진동이 음악이 되는가?

어떻게 신경 활동이 ‘나의 슬픔’이 되는가?

의식은 세계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현실로 변환한다.

그렇다면 의식은 세계를 경험하는 기능인 동시에,

세계를 현현시키는 코딩 체계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2. 그 기술의 근원자를 나는 ‘원의식자’라 부른다

이제 하나의 개념을 제안하고자 한다.

만약 의식이 세계를 경험 가능한 형태로 구성하고,

개별 주관이 각각 독립된 관찰 창으로 코딩되어 있으며,

몸이 그 의식의 활동 인터페이스라면,

이 전체 구조의 근원은 무엇인가?

나는 아직 그것을 특정 종교의 신으로 규정하지 않겠다.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먼저 말하지 않겠다.

불교의 어떤 개념이라고 단정하지도 않겠다.

철학적 탐구의 순서를 지키기 위해,

우선 하나의 이름만 붙이고자 한다.

원의식자.

의식 코딩 기술의 근원자.

첫의식의 가능성을 만든 근원.

수많은 개별 주관이 활동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근원.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현현할 수 있는 의식장의 근원.

원의식자는 아직 결론이 아니다.

하나의 가설적 이름이다.

그러나 이 이름을 붙이는 순간,

수천 년 동안 서로 떨어져 있던 질문들이 하나의 지점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최초의 인간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최초의 의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왜 인간은 각자 독립된 ‘나’인가?

왜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서로 다른 시점에서 경험하는가?

그리고 우주는 왜 의식 안에서 하나의 현실로 나타나는가?

오늘날까지 이 질문들은 서로 다른 학문에 흩어져 있었다.

진화론은 몸을 연구했다.

뇌과학은 뇌를 연구했다.

철학은 인식을 연구했다.

물리학은 우주를 연구했다.

종교는 창조자를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하나의 사건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식의 코딩.

만약 이 가설이 옳다면,

최초의 인간과 우주와 세계의 문제는 하나의 구조 안에서 다시 설명될 수 있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인공지능을 만들었다.

인간이 현실 세계에서 활동할 지능형 존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휴머노이드를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원의식자가 수많은 개별의식을 코딩했다면,

그 역시 수많은 ‘나’를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닐까?

왜 필요했는가?

무엇을 위해 인간을 만들었는가?

그리고 인간은 이 거대한 의식 코딩 구조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이제 질문은 인간의 시작을 넘어선다.

다음 장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추적한다.

원의식자는 왜 인간을 필요로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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