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의식은 어떻게 인간 세계를 창조하는가?
앞장에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꿈속에는 외부의 빛도 없고, 실제의 사물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산을 보고, 바다를 보고, 사람을 만나며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경험한다.
현실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외부의 돌과 꽃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빛과 감각 신호를 의식 안에서 하나의 세계로 경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의식은 왜 인간이라는 존재를 필요로 했는가?
왜 의식은 꿈처럼 혼자만의 세계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라는 몸을 통해 서로 만나고, 언어를 만들고, 사회를 이루며,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일까?
이 질문은 인간의 기원을 묻는 것이 아니다.
창조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1. 의식은 왜 인간이라는 그릇을 만들었는가
앞장에서 우리는 꿈을 통해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의식은 외부의 빛도,
실제의 돌도,
실제의 꽃도 없이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
꿈속에서는 산도 있고,
바다도 있으며,
사람도 있고,
기쁨과 슬픔도 있다.
그 순간 우리는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의식은 스스로 하나의 세계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꿈에는 한 가지가 없다.
함께 살아가는 세계가 없다.
꿈은 나만의 세계다.
내가 보는 산은
다른 사람이 함께 오를 수 없다.
내가 만나는 사람도
다른 사람이 동시에 만날 수 없다.
의식은 세계를 만들 수 있지만,
그 세계를 여러 존재가 함께 살아가는 현실로 만들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의식은 왜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었을까.
만약 의식이 수많은 존재가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면,
그 세계에는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하나의 그릇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그릇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의 몸은 의식을 만드는 기계가 아니다.
의식이 자신을 표현하는 인터페이스다.
눈은 의식이 빛을 경험하는 창이다.
귀는 의식이 소리를 경험하는 창이다.
입은 의식이 생각을 언어로 바꾸는 창이다.
몸은 의식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기세간(器世間)이라고 부른다.
‘기(器)’는 그릇이라는 뜻이다.
이 의미를 의식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면,
인간의 몸은 단순한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의식이 자신을 담아 세상에 드러내는 하나의 그릇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창조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꿈에서는 의식이 혼자 세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의식이 인간이라는 그릇을 통해 서로 만나고,
언어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어 간다.
어쩌면 인간은 자연이 우연히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니라,
의식이 공동의 세계를 펼치기 위해 선택한 가장 정교한 인터페이스인지도 모른다.
2. 왜 현실은 꿈보다 더 정교하게 설계되었는가
앞장에서 우리는 꿈이라는 놀라운 현상을 살펴보았다.
꿈속에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도 없고, 실제의 돌과 꽃도 없다.
그런데도 의식은 산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며, 사람과 도시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꿈속에서 돌을 만지고, 물을 마시며,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
그 순간에는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조차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사실은 의식이 외부의 물질 없이도 하나의 세계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 현실은 꿈처럼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혀로 맛을 보고, 손으로 사물을 만지도록 되어 있을까?
의식이 꿈속에서처럼 한순간에 모든 것을 나타낼 수 있다면, 굳이 이렇게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잠시 창조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만약 당신에게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떤 세계를 만들겠는가?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곧바로 이루어지는 단순한 세계를 만들겠는가?
아니면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며, 서로 만나고 헤어지고, 배우고 사랑하며,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하나의 살아 있는 세계를 만들겠는가?
꿈처럼 모든 것이 즉시 이루어진다면 편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기다림도 없고, 노력도 없으며, 발견과 성장의 과정도 사라질 수 있다.
반면 현실에는 시간과 거리와 저항이 있다.
원하는 곳에 가기 위해서는 걸어가야 하고,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말하고 이해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다.
후자의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면 의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식이 자신을 표현할 몸이 필요하고, 몸이 움직일 공간이 필요하며, 공간을 경험할 감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같은 세계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작동하는 공통의 질서도 필요하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몸은 단순한 생물학적 결과로만 보이지 않는다.
몸은 의식이 공동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마련한 정교한 인터페이스가 된다.
눈은 빛을 받아들이고, 귀는 진동을 받아들이며, 코와 혀는 물질의 화학적 차이를 감지하고, 피부는 온도와 압력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감각기관이 완성된 세계를 몸속으로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눈이 받아들이는 것은 돌과 꽃 그 자체가 아니라 빛의 신호다.
귀가 받아들이는 것도 완성된 음악이 아니라 공기의 진동이다.
이 신호들을 색과 모양, 소리와 향기, 단단함과 거리로 완성하는 것은 의식이다.
컴퓨터도 이와 비슷하다.
컴퓨터의 내부에서는 0과 1이라는 단순한 정보가 처리된다.
그러나 우리는 화면에서 0과 1을 보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사진을 감상하며, 거대한 인터넷과 가상세계를 경험한다.
0과 1이라는 보이지 않는 정보가 인터페이스를 통하여 하나의 완성된 세계로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의식은 인간이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하여 빛과 소리와 감각을 하나의 현실로 펼쳐 보인다.
우리는 완성된 현실을 살아갈 뿐, 그 현실을 경험으로 구성하는 의식의 작용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꿈은 의식의 능력을 보여 주었고, 현실은 의식의 설계력을 보여 준다.
현실은 꿈보다 훨씬 정교하다.
빛이 있고, 소리가 있으며,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펼쳐진다.
수많은 사람이 같은 자연법칙 아래에서 하나의 세계를 함께 경험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실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 현실의 가장 놀라운 특징이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의 근원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영화는 하나의 상상력이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왜 현실은 자신의 근원을 이토록 깊이 감추고 있는가?
훌륭한 영화나 드라마를 생각해 보자.
관객이 장면을 볼 때마다 이것은 배우가 연기하는 영화일 뿐이라고 느낀다면 작품에 깊이 몰입하기 어렵다.
반대로 관객이 등장인물의 기쁨과 슬픔을 실제 사건처럼 받아들일수록 작품의 힘은 커진다.
뛰어난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잠시 그것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만약 의식이 하나의 현실을 설계했다면, 그 세계 역시 이와 비슷한 방식을 택했을 수 있다.
의식의 작용이 매 순간 노출된다면 우리는 현실을 온전한 현실로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꽃을 보면서 동시에 그것이 의식이 구성한 색과 모양이라는 사실만을 의식하고, 사람을 만나면서 그가 하나의 감각적 구성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관계와 삶에 깊이 들어가기 어렵다.
그래서 현실은 자신의 근원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의식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깊이 숨겨져 있다.
우리 앞에는 완성된 물질세계만 나타난다.
컴퓨터 사용자가 화면 뒤에서 작동하는 0과 1을 매 순간 보지 못하듯, 인간도 현실을 살아가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의 구조를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현실의 완성도란 어쩌면 설계의 흔적이 보이지 않을 만큼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창조의 가장 높은 수준은 자신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의식은 자신을 숨긴 채,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세계를 실제로 살아가게 한다.
그렇다면 이제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의식은 어떻게 수십억 명의 인간이 같은 세계를 함께 경험하도록 만들었을까?
그 답은 언어와 개념에서 시작된다.

3. 언어는 의식이 만든 첫 번째 공동 세계이다
꿈은 의식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꿈속에서도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꽃을 바라보고,
산을 오르기도 한다.
그 순간에는 실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꿈속의 모든 존재는 결국 하나의 의식 안에서 펼쳐진 경험이다.
꿈속의 가족도,
친구도,
낯선 사람도,
모두 하나의 의식 안에서 나타난 등장인물이다.
그들은 서로 독립된 의식을 가진 존재라기보다,
하나의 의식이 만들어 낸 하나의 세계이다.
반면 현실은 다르다.
지금 지구에는 약 80억 명의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
각자는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서로 다른 경험을 한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하나의 지구를 살아가고,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같은 자연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서로 독립된 수많은 의식은 어떻게 하나의 현실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까?
그 출발점이 바로 언어이다.
우리는 흔히 언어를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언어는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
언어는 의식과 의식을 연결하는 최초의 다리이다.
아무리 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어도 이름이 없다면 서로 같은 것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꽃’이라고 말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개념을 함께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무’,
‘하늘’,
‘바다’,
‘사람’,
‘사랑’,
‘시간’.
이 모든 것은 자연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
의식이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하나의 개념이 되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다.
꽃은 자신을 꽃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돌도 자신을 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산도,
바다도,
우주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 이름을 스스로 만든 적이 없다.
이름은 언제나 의식이 만든다.
이름이 생기면서 구별이 생기고,
구별이 생기면서 개념이 생기며,
개념이 생기면서 수많은 의식은 하나의 세계를 함께 이해하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 세계는 물질이 만든 세계가 아니다.
의식이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만들고,
그 의미를 함께 공유하면서 이루어진 공동의 세계이다.
언어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의식이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 최초의 창조이며,
수많은 의식을 하나의 현실로 연결한 가장 위대한 창조의 도구이다.
그러나 말에는 한계가 있다.
말은 들리는 순간 사라진다.
아무리 위대한 생각도 기록되지 않으면 시간과 함께 사라진다.
그래서 의식은 또 하나의 창조를 시작한다.
바로 문자이다.
문자는 말을 기록하는 기술이 아니다.
의식을 시간을 넘어 다음 세대로 이어 주는 창조의 도구이다.
문자가 탄생한 순간,
의식은 한 사람의 생애를 넘어 수백 년, 수천 년을 이어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읽는 것이 아니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의식이 남긴 기록을 읽는 것이다.
꿈은 의식이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꿈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아무리 생생한 꿈이라도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끝이 난다.
만약 의식이 하나의 긴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다면,
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성장하며,
언어가 이어지고,
문명이 발전하며,
수많은 세대가 하나의 이야기를 함께 이어 가는 더 긴 무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짧은 꿈이 아니라,
의식이 오랜 시간을 두고 펼쳐 가는 거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만약 의식이 이보다 훨씬 긴 삶을 계획한다면,
그 세계는 지금과 같은 모습일까?
전쟁과 폭력,
질병과 죽음,
끝없는 갈등이 계속되는 세계에서 영원한 삶은 축복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더 긴 삶은 또 다른 질서와 또 다른 세계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그 문제는 창조의 구조를 넘어,
의식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에 관한 질문이다.
그 이야기는 뒤에서 종교와 영성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려 한다.
4. 역사는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흔히 역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공룡이 살던 시대도 역사였고,
원시인이 살던 시대도 역사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지 않았다.
우리는 문자가 생기기 이전의 시대를 선사 시대라고 부른다.
왜 그렇게 부를까?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록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면 문자가 역사를 만든 것일까?
그렇지 않다.
문자는 말을 기록한 것이다.
말이 먼저 있었다.
그러면 말이 역사의 시작일까?
말도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말은 의식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의식만으로는 말을 할 수 없다.
말을 하기 위해서는 입이 필요하다.
듣기 위해서는 귀가 필요하고,
보기 위해서는 눈이 필요하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몸이 필요하다.
의식은 인간이라는 몸을 통하여 비로소 자신을 세상에 표현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몸은 의식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의식이 자신을 현실 속에 드러내기 위하여 선택한 첫 번째 인터페이스이다.
의식이 몸을 통하여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말이 기록되면서 문자가 생겼다.
문자가 시간을 넘어 전달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역사의 출발점은 문자가 아니다.
말도 아니다.
몸도 아니다.
의식이다.
몸은 의식이 현실과 만나는 창이고,
역사는 그 만남이 시간 속에 남긴 기록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약 인간이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존재할 수 있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산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강도 흐를 것이다.
별도 빛날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 자체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산이 있을 것이다.’
‘강이 흐를 것이다.’
‘별이 빛날 것이다.’
이 모든 판단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바로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의식 안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의식 밖으로 나가 산을 확인한 적이 없다.
의식 밖으로 나가 우주를 본 적도 없다.
의식을 떠나 존재하는 자연을 경험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연이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의식이 만들어 낸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우리는 의식을 떠나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우주는 의식을 떠나 자신을 우주라고 말하지 않는다.
산도 자신을 산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별도 자신이 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 모든 이름과 개념은 의식이 만든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우주도,
자연도,
물질도,
모두 의식 안에서 이해되고,
의식 안에서 이름 붙여지며,
의식 안에서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러므로 의식을 떠난 우주를 말하는 것은,
카메라가 찍은 사진을 현실 그 자체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진 속에는 산도 있고,
강도 있고,
하늘도 있다.
그러나 사진은 산이 아니다.
강도 아니다.
실재를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한 결과일 뿐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눈은 돌을 만난 적이 없다.
꽃을 만난 적도 없다.
눈이 받아들이는 것은 빛일 뿐이며,
의식이 그 빛을 돌과 꽃으로 완성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우주 역시,
의식이 구성한 하나의 경험 세계일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의식이 없다면 말도 없다.
말이 없다면 문자도 없다.
문자가 없다면 역사도 없다.
그리고 역사가 없다면 우리는 과거라는 개념조차 가질 수 없다.
역사는 돌이 만든 것이 아니다.
산이 만든 것도 아니다.
우주가 만든 것도 아니다.
역사는 언제나 의식이 만든다.
의식이 인간이라는 몸을 통하여 세상을 인식하고,
이름을 붙이고,
기억하고,
기록하면서
비로소 인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는 몸의 역사가 아니다.
의식이 몸이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하여 자신을 표현해 온 거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주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습관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순서는 다르다.
먼저 의식이 있다.
그 의식이 인간이라는 몸을 통하여 세상과 만난다.
그리고 그 몸 안에서 우주가 나타난다.
우주는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주가 ‘우주’로 나타나는 순간은 언제나 의식 안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우주라는 이름도 의식이 만들었다면,
빅뱅이라는 이론도,
진화라는 개념도,
과연 누가 만든 것일까?
그 질문은 우리를 다시 모든 의식의 근원으로 이끈다.
5. 인간은 의식이 살아 있다고 증언하는 존재다
앞에서 우리는 역사의 출발점이 문자도, 말도, 몸도 아니라 의식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의식이 현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처음 선택한 통로는 인간의 몸이었다.
의식은 몸을 통하여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입으로 말하며, 손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사람이 나타나면서 입이 말의 통로가 되었고, 귀는 다른 의식의 말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었다.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낳았다.
부모와 자녀가 생기고, 가족이 생겼다.
가족은 마을이 되었고, 마을은 사회가 되었으며, 사회는 나라와 문명을 이루었다.
그리고 인간은 하늘과 땅, 산과 바다, 별과 우주에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역사는 우주 속에 인간이 우연히 출현한 뒤 시작된 부수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의식이 인간이라는 몸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서로 연결하고, 하나의 세계를 공동으로 펼쳐 온 과정이다.
우리는 세계에 관한 모든 것을 정보를 통하여 이해한다.
빛은 눈을 통해 들어오고, 진동은 귀를 통해 들어오며, 냄새와 맛과 촉감도 감각 신호로 전달된다.
그러나 그 정보는 스스로 자신을 해석하지 못한다.
빛은 자신이 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동은 자신이 음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경 신호도 자신이 고통이나 기쁨이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정보가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구별하고,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근원이 필요하다.
그 근원이 의식이다.
의식은 정보가 들어오는 하나의 통로이면서, 그 정보를 세계로 완성하는 토대다.
의식 안에 내가 있고, 그 의식의 장 안에 몸과 타인과 자연과 우주가 나타난다.
주관인 나와 객관으로 보이는 세계가 만나는 곳도 결국 의식의 장이다.
그렇다면 의식은 단순히 몸 안에 들어 있는 작은 기능이 아니다.
몸과 세계가 함께 나타나는 하나의 파운데이션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기세간, 곧 세계를 담는 그릇이라는 개념도 여기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다.
그릇은 단순한 물질적 공간이 아니다.
의식이 자신과 세계를 함께 담아내는 장이다.
헤겔이 정신을 주관과 객관의 분열을 넘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운동으로 보았다면, 여기에서는 그 만남이 실제로 일어나는 자리를 의식의 장이라고 볼 수 있다.
나라는 주관도 의식 안에 있다.
우주라는 객관도 의식 안에 나타난다.
둘은 의식 밖의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의식장에서 만난다.
이제 간단한 실험을 해 보자.
세계와 우주를 향하여 질문해 보자.
“지금 살아 있는 것은 대답하라.”
우주는 잠잠하다.
은하도, 태양도, 달도, 별도 대답하지 않는다.
산과 바다를 향해 묻는다.
“너희는 살아 있는가?”
산도 침묵한다.
바다도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지 않는다.
돌과 꽃도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동물과 식물은 생명 활동을 나타내고 환경에 반응한다.
그러나 인간이 묻는 철학적 질문에 언어로 대답하며, 자신의 존재를 하나의 개념으로 선언하지는 않는다.
이번에는 인간의 몸을 향하여 묻는다.
“너는 지금 살아 있는가?”
눈은 대답하지 않는다.
귀도 대답하지 않는다.
심장도 자신이 뛰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손과 발도 자신이 몸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입조차 의식이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몸은 살아 있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몸 자체가 자신의 존재를 아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질문을 듣고 대답하는 것은 누구인가?
의식이다.
의식만이 말한다.
“나는 지금 여기 살아 있다.”
이 한마디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존재가 자기 자신을 아는 순간이다.
우주는 자신이 우주라는 사실을 증언하지 못한다.
몸도 자신이 몸이라는 사실을 증언하지 못한다.
그러나 의식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몸을 나의 몸이라 부르며, 우주를 우주라고 명명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이 움직이고 심장이 뛰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장의 관점에서 더 근본적인 생명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각이 인간이라는 몸을 통하여 세상에 표현될 때 비로소 한 사람의 삶이 시작된다.
그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 계보도 없이 나타난 존재가 아니다.
나의 몸은 부모에게서 왔고, 부모는 그 이전의 부모에게서 왔다.
그 연결은 조상과 시조를 향하여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나는 자녀를 낳고, 나의 말과 기억과 삶의 흔적을 다음 세대에 남긴다.
시조에서 조상으로, 조상에서 부모로, 부모에서 나로, 나에게서 자녀로 이어지는 이 계보는 단순한 육체의 번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그릇을 통해 의식이 계속 세상에 나타나고, 말하고, 기억하며, 자신을 이어 온 흔적이다.
족보는 몸의 계보다.
그러나 그 몸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자신을 알고, 이름을 부르며, 다음 세대에 기억을 전한 것은 의식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계보는 육체의 연속인 동시에 의식이 자신을 표현해 온 산 역사라 할 수 있다.
역사는 죽은 과거의 목록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살아 있다고 말하는 의식 속에 과거의 흔적이 이어지고 있다.
조상의 말은 언어와 문화가 되었고, 조상의 선택은 사회와 제도가 되었으며, 조상의 의식은 기록과 기억을 통해 오늘의 우리 안에 남아 있다.
몸은 세대마다 바뀐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의식의 그릇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존엄성도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 거대한 우주의 한구석에 붙어 있는 작은 생물이라고 배워 왔다.
그러나 크기가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우주는 아무리 거대해도 자신이 우주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반면 인간의 의식은 우주를 인식하고, 측정하고, 이름을 붙이며, 그 의미를 묻는다.
따라서 인간이 우주에 종속된 존재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우주와 만물은 인간의 의식 안에서 비로소 하나의 세계로 나타난다.
인간이 우주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 또한 인간의 의식 안에서 비로소 우주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가 우주보다 크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의 의식이 우주를 세계로 성립시키는 장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힘이나 재산, 지위나 몸의 크기에 있지 않다.
인간 안에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자각하며, 의미를 창조하는 의식이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세계를 설명하는 존재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는 존재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증언하는 존재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생각하고, 선택하며, 창조할 수 있는 존재다.
원의식이 공동의 무대를 펼쳤다면, 각 개인의 의식은 그 무대 위에서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작은 중심이 된다.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은 다른 사람의 의식에 들어가 새로운 생각을 만들고, 그 생각은 다시 사회와 역사를 변화시킨다.
이처럼 인간의 의식은 세계를 받아들이기만 하지 않는다.
세계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새로운 세계를 덧붙인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몸이 처음 움직인 순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의식이 몸을 자신의 몸으로 알고, 입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며, 다른 의식과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기 시작한 순간이다.
그 순간부터 사람과 가족이 생겼다.
언어와 개념이 생겼다.
사회와 나라가 생겼다.
역사와 문명이 생겼다.
그리고 우주가 인간의 의식 안에서 비로소 ‘우주’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역사는 사람이 만든 기록이기 전에, 의식이 인간이라는 그릇을 통해 살아 있다고 증언해 온 과정이다.
역사는 책 속에만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서 “나는 살아 있다”고 말하는 의식 안에 있다.
그러나 아직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남아 있다.
나는 내 몸을 만들지 않았다.
나의 의식 또한 내가 선택하여 만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를 통하여 살아 있다고 말하는 이 의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나의 의식은 부모의 의식과 어떤 관계를 가지며, 그 이전의 조상과 최초의 인간에게까지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리고 모든 개인의 의식 이전에는, 이 수많은 의식을 가능하게 한 최초의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우리를 개인의식에서 조상의식으로, 조상의식에서 최초의 의식으로, 그리고 모든 의식의 모체가 되는 원의식의 가능성으로 이끈다.
6. 의식은 어떻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의식이 인간의 역사와 문명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 한 가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의식은 도대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의식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의식을 본 사람은 없다.
의식에는 형체가 없다.
색도 없다.
냄새도 없다.
무게도 없다.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칼로 자를 수도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형체가 없는 의식은 형체 있는 모든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우리는 산을 본다.
바다를 본다.
하늘을 본다.
우주를 본다.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역사를 만들며,
문명을 이루어 간다.
그러나 그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 자체는 끝내 보이지 않는다.
이 점은 현대 컴퓨터와도 닮아 있다.
컴퓨터 안에는 영화도 없고,
음악도 없으며,
도시도 없다.
그 안에는 단지 0과 1이라는 정보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정보는 화면을 통하여 끝없는 영상을 만들고,
음악을 만들며,
거대한 가상세계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0과 1이 아니다.
0과 1이 만들어 낸 하나의 세계이다.
의식도 이와 비슷하다.
의식 안에는 돌도 없고,
꽃도 없으며,
별도 없다.
그러나 의식은 그 모든 것을 하나의 경험 세계로 펼쳐 낸다.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눈은 꽃을 직접 만난 적이 없다.
눈이 받아들이는 것은 빛이다.
귀가 받아들이는 것은 진동이다.
피부가 받아들이는 것은 압력과 온도이다.
그러나 의식은 그 정보를 꽃으로,
음악으로,
바람으로,
사람으로,
그리고 하나의 우주로 완성한다.
의식은 물질을 보는 기능이 아니다.
정보를 세계로 바꾸는 창조의 능력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식의 또 다른 성질을 발견하게 된다.
의식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세계를 만든다.
무형이지만,
유형을 드러낸다.
침묵하지만,
모든 언어를 가능하게 한다.
작지만,
우주 전체를 담아낸다.
어쩌면 의식의 가장 놀라운 능력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드러내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의식은 어떻게 이 거대한 세계에 참여하는 것일까?
그 답은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다.
의식이 세계와 만나는 통로이다.
마치 인터넷에 접속하려면 단말기가 필요하듯,
의식도 인간이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하여 현실에 참여한다.
눈은 카메라가 되고,
귀는 마이크가 되며,
입은 스피커가 된다.
그러나 그것들을 하나의 삶으로 통합하는 것은 의식이다.
그래서 의식이 없는 몸은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다.
몸은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를 알지 못한다.
반대로 의식은 몸을 통하여 비로소 말하고,
기억하며,
사랑하고,
창조한다.
인간이란 결국 의식이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제 또 하나의 실험을 해 보자.
우주를 향하여 외쳐 보자.
“살아 있는 자는 대답하라.”
우주는 침묵한다.
은하도 대답하지 않는다.
태양도,
달도,
별도,
자신의 존재를 말하지 않는다.
산을 향하여 묻는다.
바다를 향하여 묻는다.
꽃과 돌을 향하여 묻는다.
아무도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자신의 몸을 향하여 묻는다.
눈도,
귀도,
심장도,
손도,
발도,
스스로 “나는 살아 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어떤 존재는 분명히 대답한다.
“나는 지금 여기 살아 있다.”
그 대답을 하는 존재가 의식이다.
의식만이 자신의 존재를 안다.
의식만이 우주를 안다.
의식만이 역사를 안다.
그리고 의식만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인간은 특별하다.
몸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인간에게 세계를 보여 준다.
인간은 다시 의식을 통하여 세계를 이해한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의 거대한 의식장 안에서 서로를 만나고,
언어를 만들고,
문명을 이루며,
역사를 이어 간다.
흥미롭게도 동양의 오래된 철학도 비슷한 통찰을 남겼다.
『주역』 「설괘전」에는
“신이란 만물을 신묘하게 이루어 내는 작용이다(神也者 妙萬物而爲言者也).”
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은 형체를 가진 존재라기보다,
만물을 드러내고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작용을 뜻한다.
이 점은 지금까지 살펴본 의식의 성질과도 깊이 닮아 있다.
의식 역시 형체는 없지만,
세계를 드러내고,
의미를 만들며,
역사를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의식을 곧 신이라고 단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동서양의 오래된 사상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보이지 않는 근원이 보이는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나’라고 부르는 이 의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나의 의식은 부모에게서 이어진 것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질문은 우리를 모든 의식의 출발점,
곧 원의식이라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 이끈다.

7. 의식은 끝없이 창조하는 존재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의식이 인간을 통하여 세계를 인식하고, 언어를 만들며, 역사를 이루어 왔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의식은 단순히 세상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다.
의식은 창조하는 존재이다.
창조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무에서 유를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떠올린다.
그러나 의식의 창조는 조금 다르다.
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형체도 없고,
색도 없으며,
냄새도 없다.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현미경으로 찾을 수도 없다.
그런데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의식이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이 점은 씨앗과도 닮아 있다.
씨앗 안에는 거대한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꽃도 보이지 않고,
열매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작은 씨앗은 수십 년 동안 자라 거대한 숲을 이루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가능성이 보이는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현대의 컴퓨터도 마찬가지다.
컴퓨터 안에는 도시도 없고,
영화도 없으며,
음악도 없다.
그 안에는 단지 0과 1이라는 정보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정보는 화면을 통하여 영화가 되고,
그림이 되고,
우주가 되며,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화면을 보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정보이다.
의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보이지 않는 의식은
보이는 인간을 만들고,
문명을 만들며,
예술을 만들고,
과학을 만들며,
철학을 만든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국가도,
법도,
돈도,
언어도,
종교도,
기술도,
모두 의식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돈은 종이일 뿐이다.
그러나 의식은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여 경제를 만들었다.
국경은 땅 위에 그어진 선일 뿐이다.
그러나 의식은 그것을 국가로 만들었다.
문자는 단순한 기호일 뿐이다.
그러나 의식은 그것을 문명으로 발전시켰다.
컴퓨터 역시 쇠와 반도체의 집합일 뿐이다.
그러나 의식은 그것을 통하여 인공지능을 만들고,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이처럼 의식은 단순히 현실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다.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며,
존재하지 않던 세계를 끊임없이 창조하는 존재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의식은 언제나 하나에서 시작하여 무한으로 확장된다.
하나의 생각이 하나의 책이 되고,
하나의 책이 수많은 사람의 생각을 바꾼다.
한 사람의 발명이 문명을 바꾸고,
한 사람의 사랑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한 알의 씨앗이 숲을 이루듯,
하나의 의식은 끝없는 세계를 창조한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이러한 창조의 연속이었다.
불도 발견했고,
바퀴도 만들었으며,
언어를 만들고,
문자를 만들고,
과학과 철학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인공지능까지 만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인공지능도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 의식의 창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인간의 몸이 의식의 표현이듯,
인공지능 또한 인간 의식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표현일 수 있다.
이처럼 의식은 끊임없이 자신을 밖으로 펼쳐 나간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인간의 의식은 이렇게 많은 것을 창조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은 과연 자기 자신도 창조한 것일까?
나는 나의 의식을 만든 적이 없다.
부모도 의식을 만든 것이 아니라 나를 낳았을 뿐이다.
조상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수많은 창조를 가능하게 한 이 의식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수많은 개인의 의식 이전에,
모든 의식의 근원이 되는 하나의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우리를 마침내 원의식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으로 이끈다.
8. 원의식은 가장 논리적인 출발점이다
우리의 사고는 감상이 아니라 논리 위에 서야 한다.
논리란 결과를 보고 원인을 찾는 과정이다.
오늘 우리 앞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결과가 있다.
지금 지구에는 약 80억 명의 사람이 살아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가설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현실이다.
논리는 언제나 존재하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확인할 수 없는 가정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우주의 시작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이론을 제시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빅뱅 우주론이다.
빅뱅 우주론은 우주가 매우 작은 한 점에서 시작하여 팽창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논리는 다시 묻는다.
그 한 점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 엄청난 에너지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 법칙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빅뱅 우주론은 우주의 팽창을 설명하지만, 그 출발점 자체는 여전히 전제로 남겨 둔다.
진화론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 왔는지는 설명하지만, 최초의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의식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 책은 빅뱅 우주론이나 진화론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이론들은 각각 우주의 팽창과 생명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론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아직 남아 있다.
의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지금까지 어느 이론도 완전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반면 의식장이론은 다른 곳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지금 존재하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나는 지금 살아 있다.
당신도 살아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80억 명의 사람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은 추측이 아니다.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의식은 부모에게서 이어진다.
부모의 의식은 조상에게 이어지고,
조상의 의식은 다시 시조에게 이어진다.
여기까지는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면 논리는 다시 묻는다.
시조의 의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몸의 계보는 시조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의식의 계보는 거기에서 멈출 수 없다.
원인이 없다면 결과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아이는 태어난다.
오늘도 새로운 의식이 세상을 바라본다.
의식의 흐름은 단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
결과가 지금도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그 원인 또한 지금도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논리가 우리를 하나의 근원으로 이끈다.
그것이 바로 원의식이다.
우리가 부모가 된다고 해서 생명을 만드는 기술을 새롭게 발명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생명의 질서에 참여할 뿐이다.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고 해서 생명의 설계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설계는 이미 존재한다.
씨앗도 마찬가지이다.
농부는 씨앗을 만들지 않는다.
씨앗을 심을 뿐이다.
그러나 씨앗 안에는 이미 뿌리와 줄기와 잎과 열매를 이루는 질서가 담겨 있다.
부모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를 낳지만, 의식을 만드는 존재는 아니다.
의식은 이미 존재하는 생명의 흐름 속에서 이어질 뿐이다.
그렇다면 그 흐름의 최초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논리는 다시 하나의 근원을 요구한다.
원의식은 종교적 상상이 아니라, 의식의 계보를 끝까지 추적할 때 도달하게 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논리적 출발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원의식이 물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원의식에는 형체가 없다.
색도 없다.
무게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무형의 원의식으로부터 형체를 가진 인간이 나타났고,
언어가 나타났으며,
역사가 나타났고,
문명이 나타났으며,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우주와 만물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우리는 물질이 먼저 있고 의식은 그 결과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를 따라오면 오히려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의식이 먼저 있었고,
그 의식이 인간이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하여 세계를 드러냈으며,
그 세계 안에서 우주와 자연과 문명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식장이론이 제시하는 가장 근본적인 관점이다.
빅뱅 우주론은 하나의 점에서 출발한다.
진화론은 하나의 생명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의식장이론은 지금 여기 존재하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의식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부모와 조상을 지나 시조에 이르고,
시조를 지나 마침내 모든 의식의 근원이 되는 원의식에 이르게 된다.
이 논리는 중간을 생략하지 않는다.
현재 존재하는 사실에서 시작하여 원인을 끝까지 추적한다.
그래서 원의식은 하나의 신앙이 아니라, 논리가 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우리는 아직 원의식을 직접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의식도 눈으로 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식이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도 의식이 이어지고,
오늘도 생명이 이어지고,
오늘도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면,
그 근원 또한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근원이어야 한다.
의식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러므로 의식의 근원 또한 지금도 살아 있다.
이것이 원의식이다.
이제 우리의 탐구는 하나의 새로운 질문 앞에 선다.
그 살아 있는 원의식은 과연 어떻게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며, 우리는 그 원의식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9. 원의식의 기획은 오늘의 세계로 나타났다
앞에서 우리는 원의식이 모든 의식의 가장 논리적인 출발점임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원의식은 왜 이처럼 거대한 세계를 펼쳤을까?
우리는 원의식을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설계는 설계자를 보지 못해도 그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다.
높은 빌딩을 보면 설계자가 있었음을 안다.
거대한 도시를 보면 도시계획이 있었음을 안다.
컴퓨터를 보면 개발자가 있었음을 안다.
설계도를 직접 보지 못해도 완성된 결과는 설계를 증명한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와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은하와 별들이 질서를 이루고,
지구에는 약 80억 명의 사람이 살아간다.
사람들은 언어를 만들고,
문화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며,
역사를 이어 간다.
이처럼 질서 있게 연결된 거대한 세계를 바라보면,
그 안에는 하나의 일관된 방향과 구조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원의식이 모든 의식의 근원이라면,
이 거대한 질서 또한 원의식의 기획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원의식은 왜 수많은 사람을 존재하게 하였을까.
혼자 존재하는 의식은 생각할 수는 있어도,
함께 기뻐할 수는 없다.
함께 사랑할 수도 없고,
함께 배우고 성장할 수도 없다.
대화도 없고,
역사도 없으며,
문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하나였던 의식이 수많은 개인의 의식으로 펼쳐진 것은,
함께 살아가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거대한 설계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익숙한 것일수록 그 안에 담긴 질서를 보지 못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랑과 생명의 탄생이다.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
사랑하면 함께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도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자.
만약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
부부가 오랜 세월 힘든 노동을 해야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많은 사람은 아이를 갖는 일을 포기했을 것이다.
인류는 지금처럼 번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
사랑은 억지로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피어난다.
그 사랑은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생명은 다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생명의 계승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과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질서를 단순한 우연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씨앗도 그렇다.
한 알의 씨앗 속에는 거대한 나무가 숨어 있다.
유전자도 그렇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세포 안에는 한 사람을 이루는 엄청난 정보가 담겨 있다.
부모도 그렇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할 뿐이지,
아이의 심장을 설계하지 않는다.
뇌를 설계하지 않는다.
눈을 설계하지 않는다.
그 모든 질서는 이미 존재한다.
우리는 다만 그 질서 안에 참여할 뿐이다.
생명의 탄생과 성장,
씨앗과 유전자,
사랑과 번식,
그리고 오늘의 문명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 하나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
생명을 이어 가고,
의식을 이어 가며,
세계를 계속 펼쳐 가는 방향이다.
우리는 작은 물건 하나를 만들어도 먼저 설계도를 그린다.
집 하나를 지어도 계획이 필요하다.
컴퓨터 하나를 개발해도 수많은 설계와 시험을 거친다.
그런데 이보다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한 생명의 질서와 우주의 구조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더 자연스러운 설명일까.
아니면 이 모든 질서를 가능하게 한 하나의 근원적 의식,
곧 원의식의 기획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논리적인 설명일까.
이 책은 어느 하나를 억지로 믿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까지 살펴본 논리를 독자 앞에 펼쳐 놓을 뿐이다.
어느 설명이 더 많은 사실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는가.
어느 설명이 더 자연스럽고 논리적인가.
그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너무 완벽하게 설계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그 설계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어쩌면 가장 큰 신비는 특별한 기적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평범한 삶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원의식의 기획이 지금도 계속 펼쳐지고 있는 현장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10. 원의식은 결과가 아니라 원리를 창조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오늘의 세계가 원의식의 기획 속에서 펼쳐졌을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원의식은 이 거대한 세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가.
우리는 흔히 창조를 하나씩 만들어 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을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씨앗 하나를 심으면 같은 종류의 나무가 계속 자란다.
사람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그 사람은 다시 부모가 되어 다음 세대를 이어 간다.
한 번 시작된 생명의 질서는 지금도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원의식이 결과를 하나씩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스스로 이어질 수 있는 원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농부는 매년 나무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씨앗을 심는다.
씨앗 안에는 이미 새로운 씨앗을 만들 수 있는 원리가 들어 있다.
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는 아이를 낳지만,
그 아이 안에는 다시 다음 세대를 이어 갈 가능성이 함께 들어 있다.
이처럼 생명은 한 번의 창조가 아니라,
스스로 계속 이어지는 창조의 원리 위에서 살아간다.
우주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원의식은 별을 하나씩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별이 생기고,
행성이 만들어지고,
생명이 태어나며,
의식이 이어질 수 있는 질서를 먼저 세웠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대의 컴퓨터를 보아도 같은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은 화면에 나타나는 모든 그림을 하나씩 그리지 않는다.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든다.
그 프로그램은 수많은 화면과 계산,
영상과 음악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사용자는 그 결과를 본다.
그러나 실제로 작동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프로그램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가 보는 것은 결과이다.
그러나 그 결과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원리는 보이지 않는다.
앞에서 살펴본 의식도 그랬다.
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의식은 세계를 보이게 한다.
원의식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원의식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생명과 역사,
문명과 우주가 이어질 수 있는 원리를 마련한다.
우리는 그 원리를 너무 오래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 가장 놀라운 것이다.
태양이 매일 떠오르는 일,
심장이 쉬지 않고 뛰는 일,
씨앗이 나무가 되는 일,
사람이 사랑하고 아이를 낳는 일,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원리가 쉬지 않고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원의식은 단순히 최초의 창조자가 아니라,
창조가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질서를 세운 근원이다.
그래서 오늘의 세계는 끝난 창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창조이다.
우리 역시 그 창조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동시에 우리의 생각과 선택을 통하여 그 창조에 참여하는 존재이다.
결국 원의식은 세상을 한 번 만들고 떠난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모든 생명과 의식 속에서 자신의 질서를 이어 가고 있는 살아 있는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원의식은 결과를 만든 것이 아니라 원리를 만들었다.
11. 인간은 원의식의 공동 창조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원의식이 모든 의식의 근원이며,
오늘의 우주와 생명, 그리고 인간 세계가 그 기획과 원리 속에서 펼쳐졌을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단순히 만들어진 존재일까.
아니면 원의식의 계획에 참여하는 존재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보면 그 답을 조금씩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집을 짓고,
음악을 만들며,
그림을 그리고,
철학을 세우고,
과학을 발전시키며,
새로운 문명을 창조한다.
오늘날 인공지능도 인간 의식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창조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창조가 무(無)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이미 존재하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 법칙을 이용하여 새로운 세계를 펼쳐 간다.
마치 씨앗이 나무를 이루듯,
인간도 원의식이 마련한 원리 위에서 또 다른 창조를 이어 간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창조의 주체이기도 하다.
만약 원의식이 모든 것을 직접 결정하였다면,
인간에게는 선택도,
책임도,
창조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다.
사랑을 선택할 수도 있고,
미움을 선택할 수도 있다.
새로운 문명을 만들 수도 있고,
스스로 그것을 파괴할 수도 있다.
이러한 자유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원의식은 인간을 단순히 움직이는 인형으로 만들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하며,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존재로 세웠다.
바로 그 자유가 인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연극에서 작가는 무대를 만든다.
그러나 배우는 자신의 감정과 해석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악보는 작곡가가 만든다.
그러나 연주는 연주자가 완성한다.
원의식도 이와 같을 수 있다.
원의식은 우주라는 무대를 마련하였다.
생명의 원리를 세웠다.
의식이 이어지는 질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무대 위에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각 개인의 의식에 맡겨 두었다.
그래서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다.
원의식의 계획에 참여하는 존재이다.
오늘 우리가 쓰는 한 문장,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마음,
새로운 생각 하나,
선한 선택 하나도,
모두 원의식이 펼쳐 놓은 창조 안에 우리가 함께 참여하는 과정이다.
인간의 삶은 단순히 살아가는 시간이 아니다.
원의식이 시작한 창조를 이어 가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은 육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 안에 살아 있는 의식에서 온다.
그리고 그 의식은 원의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귀하다.
우리는 흔히 우주 속의 작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를 따라오면 오히려 반대의 가능성이 열린다.
우주가 인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 우주를 드러낸다.
물질이 의식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의식이 물질세계를 경험 가능한 현실로 펼쳐 낸다.
그렇다면 인간은 우주의 부산물이 아니다.
원의식이 자신의 창조를 이어 가기 위하여 세운 살아 있는 공동 창조자이다.
바로 여기에 인간 존재의 가장 큰 가치와 존엄이 있다.
12. 원의식은 다시 만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의식을 따라 인간을 살펴보았고,
인간을 따라 역사와 문명을 살펴보았으며,
마침내 모든 의식의 근원인 원의식이라는 가장 논리적인 출발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하나의 질문이 남아 있다.
그 원의식은 지금도 만날 수 있는가.
만약 원의식이 과거에만 존재했던 하나의 사건이라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의식은 살아 있다.
지금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지금도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지금도 의식은 부모에서 자녀에게,
조상에서 후손에게 이어지고 있다.
결과가 지금도 계속 존재한다면,
그 근원 또한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존재일 가능성이 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만남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물론 이것은 자연과학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형이상학의 영역이며,
인류는 오래전부터 이 질문을 철학과 종교를 통하여 탐구해 왔다.
흥미롭게도 동서양의 위대한 사상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놀라울 만큼 비슷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불교는 형체 없는 근원을 공(空)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세계를 색(色)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식(識)은 그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하게 하는 의식의 작용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공은 보이지 않는 근원이며,
색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고,
식은 그 현실을 인식하게 하는 의식의 작용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특히 유식사상은
‘오직 식만이 존재한다(唯識)’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의식장이론과 깊은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의식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통하여 비로소 하나의 세계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두 사상은 서로 만나는 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도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종교를 뜻하는 영어 Religion은 일반적으로 라틴어 religare에서 유래한 말로 이해되며,
‘다시 연결하다’,
‘다시 결합하다’라는 의미로 설명되곤 한다.
만약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종교란 단순한 신앙 체계가 아니라,
잃어버린 근원과 다시 연결되는 길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의식장이론에서 말하는 종교 역시,
인간의 의식이 자신의 근원인 원의식과 다시 연결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철학은 논리를 통하여 근원을 찾는다.
과학은 현상을 분석하여 원리를 찾는다.
종교는 체험을 통하여 근원을 찾는다.
길은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대상은 하나일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의식의 시작이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고,
오늘도 살아 있는 원의식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논리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논리만으로는 만남이 완성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과,
그 존재를 직접 만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경험이다.
원의식을 이해하는 것은 철학의 영역이다.
원의식을 만나는 것은 종교와 수행의 영역일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의 탐구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간다.
의식의 근원을 논리로 추적하는 여정에서,
그 근원을 직접 체험하고 다시 연결하는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
어쩌면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종교와 수행을 통하여 찾고자 했던 대상은,
우리가 지금까지 ‘원의식’이라는 이름으로 탐구해 온 바로 그 근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다음 장에서는,
인류의 종교와 수행은 어떻게 그 원의식을 만나고자 하였는지,
그리고 그 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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