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재료는 무엇인가?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인간은 약하다.
바람에도 흔들리고, 병에도 흔들리고, 죽음 앞에서는 더욱 작아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상한 능력이 하나 있다.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늘을 보며 묻는다.
우주는 어디서 왔을까?
나는 어디서 왔을까?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어떻게 무언가가 생길 수 있었을까?
처음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을까?
우리는 흔히 말한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것도 없었다면, 무엇이 어떻게 생길 수 있었을까?
저 수많은 은하계는 처음 무엇에서 시작되었을까?
우주의 재료는 무엇이었을까?
그 재료는 어디서 온 것일까?
밖에서 수입해 온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우주 밖도 처음에는 없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더 깊어진다.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우주가 생겼는가?
무에서 유가 생긴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무”라고 부르는 그 자리에는 사실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어떤 근원이 있었던 것인가?
우리 집 삽살이와 야옹이의 시조
이 질문은 우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집 귀염둥이 삽살이도 그렇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개는 엄마 개와 아빠 개에게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 엄마 개와 아빠 개도 각각 부모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언젠가 최초의 개, 혹은 개의 시조와 만난다.
그렇다면 그 최초의 시조는 어디서 왔을까?
우리 집 야옹이도 마찬가지다.
고양이는 고양이 부모에게서 태어난다.
그 부모에게도 부모가 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고양이는 어디서 왔는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땅에서 솟았을까?
아니면 생명의 흐름 속에서 어떤 시작점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제 질문은 나에게 돌아온다.
내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부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도 그들의 부모가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다.
조부모에게도 부모가 있었다.
조상에게도 부모가 있었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최초의 시조 할아버지와 시조 할머니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그들은 누구에게서 왔는가?
그들의 부모는 누구였는가?
만약 모든 인간이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최초의 인간은 어떻게 생겼는가?
여기서 인간은 이상한 벽과 마주한다.
나의 출발은 분명 부모다.
부모의 출발은 조부모다.
조상의 출발은 또 다른 조상이다.
그런데 최초의 출발은 어디인가?
생각하지 않으면 이 질문도 없다
여기서 더 이상한 사실이 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런 질문도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파스칼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라고 한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 말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칸트가 “우리가 보는 세상은 표상이다”라고 한 연구를 하지 않고 발표하지 않았다면 그 사상은 세상에 없다.
만약 데모크리토스가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았으면 그 사상도 세상에 없을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 하지 않고 그것을 널리 알리지 않았다면 양자역학의 아직도 불확정성의 원리를 사람들은 모를 수 있다…
이 처럼,
우주의 시작도,
생명의 시작도,
인류의 시작도,
최초의 부모에 대한 질문도,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내 세계 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집 삽살이는 이런 질문을 할까?
“나는 어디서 왔을까?”
“최초의 개는 누구였을까?”
우리 집 야옹이는 이런 생각을 할까?
“우주의 재료는 무엇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묻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묻고,
우주를 묻고,
죽음을 묻고,
시작을 묻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특별함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있는 것은 아닐까?
우주는 계속 커지고 있다는데
현대 과학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주는 지금도 넓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또 질문이 생긴다.
우주가 커진다면 그 커지는 공간은 어디서 오는가?
새로운 공간의 재료는 무엇인가?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은 단순히 풍선이 커지는 것과 같을까?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 자체가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것일까?
하루하루 우주가 커지고 있다면, 그 커짐의 근원은 무엇인가?
우주 밖에서 무엇을 가져오는가?
그럴 수는 없다.
우주 밖이라는 말도 결국 인간의 생각 안에서만 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다면 우주는 존재하는가?

이제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우주가 있다고 가정하자.
별도 있고,
은하도 있고,
태양도 있고,
지구도 있다.
그런데 그 우주 안에 생각하는 존재가 단 한 명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 우주가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우주가 있어도 그것을 아는 존재가 없다면,
그 우주는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인간이 몰라도 우주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말도 결국 인간의 생각이다.
인간이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 없어도 우주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존재를 말하는 모든 진술은 생각을 통과한다.
우리가 말하는 우주는 생각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우주는 언제나 생각 안에 나타난 우주다.
흑암물질은 있는가, 없는가?
현대 과학은 우주의 대부분이 보이지 않는 물질과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아직 직접적으로 완전히 파악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발견되지 않은 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때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우선은 인간의 이론 속에 있다.
인간의 생각 속에 있다.
그런데 언젠가 발견되었다고 해보자.
그때 그것은 생각 밖으로 나가는가?
그렇지 않다.
발견되었다는 판단도 생각 안에서 이루어진다.
“있다”는 말도 생각이고,
“없다”는 말도 생각이고,
“아직 모른다”는 말도 생각이다.
이처럼 인간에게 나타나는 세계는 생각을 벗어나지 않는다.
우주는 인간 생각 밖에 있는가?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우주는 바깥에 있고,
나는 그 우주 안에 살고 있다고.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말도 생각이 만든 구조다.
내가 보는 하늘,
내가 아는 지구,
내가 말하는 우주,
내가 상상하는 빅뱅,
이 모든 것은 내 의식 안에서 나타난다.
우주가 내 몸보다 크다고 해서, 내가 아는 우주가 생각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아는 우주는 생각 안에서만 나타난다.
인간은 생각 안에서 우주를 보고,
생각 안에서 자신을 보고,
생각 안에서 신을 묻고,
생각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깥 세계를 산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생각이 구성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은 코딩되어 있는가?
우리가 외부 세계가 있다고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생각이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눈을 뜨면 바깥이 보인다.
손을 뻗으면 물체가 만져진다.
소리가 들리고, 냄새가 나고,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말한다.
“밖에 세계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감각과 판단은 생각 안에서 통합된다.
생각은 우리에게 외부 세계가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
마치 프로그램이 화면을 보여주듯이,
의식은 세계라는 화면을 펼쳐 보인다.
그러므로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단순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생각과 감각과 인식이 함께 만들어내는 하나의 장면일 수 있다.
빅뱅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이제 다시 빅뱅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빅뱅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은 누가 하는가?
생각이 한다.
아무것도 없었다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도 생각이다.
빅뱅 후에 원자가 생기고,
분자가 생기고,
세포가 생기고,
생명체가 생기고,
인간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도 생각이다.
그 모든 과정은 결국 생각 안에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빅뱅도 생각 안에서 나타난 사건이다.
원자도 생각 안에서 나타나고,
생명도 생각 안에서 나타나고,
인간도 생각 안에서 나타난다.
이 말은 우주가 단순히 상상이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 알고 말하고 해석하는 모든 우주는 생각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다.
생각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
인류가 없던 시절을 생각해 보자.
인간이 없으면 인간의 생각도 없다.
인간의 생각이 없으면, 인간이 말하는 우주도 없다.
그렇다면 인류 이전의 우주는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는 과학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때도 우주는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지금 인간이 하는 말이다.
지금 인간의 생각 안에서 과거의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에게 나타나는 과거도 생각 안에 있다.
미래도 생각 안에 있다.
우주도 생각 안에 있다.
나도 생각 안에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생각은 어디서 왔는가?
나의 생각은 원본인가, 복사본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완전한 원본일까?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모가 있었고,
조부모가 있었고,
조상이 있었다.
내 생각은 아무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부모에게서 몸을 받았고,
말을 배웠고,
세계를 배웠고,
생각하는 방식을 배웠다.
부모도 조상에게서 이어받았다.
조상도 더 오래된 조상에게서 이어받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 있는 복사본일 수 있다.
각 사람은 자기 생각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생각은 더 깊은 근원으로부터 흘러온 것일 수 있다.
최초의 생각은 어디서 왔는가?
나의 생각은 부모의 생각과 연결된다.
부모의 생각은 조상의 생각과 연결된다.
조상의 생각은 시조의 생각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시조의 생각은 어디서 왔는가?
시조에게 생각을 준 존재는 누구인가?
만약 최초의 인간에게 생각이 주어졌다면,
그 생각을 준 근원이 있을 것이다.
그 근원이 바로 생각의 원본이다.
우리는 복사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러나 복사본이 있다는 것은 원본이 있다는 단서가 된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원형이 있다는 뜻이다.
메아리가 있다는 것은 처음 소리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각 역시 어떤 원본 생각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우주의 재료는 생각인가?
여기서 천봉의 질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주의 재료는 무엇인가?
물질인가?
에너지인가?
정보인가?
아니면 생각인가?
인간이 아는 물질도 생각 안에서 나타난다.
인간이 말하는 에너지도 생각 안에서 이해된다.
정보도 생각 없이는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더 근원적인 재료는 생각일 수 있다.
생각이 먼저 있고,
그 생각 안에서 우주가 나타나고,
생명이 나타나고,
인간이 나타나고,
역사가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생각의 원본에 붙여진 이름들

인류는 오래전부터 이 원본을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왔다.
성경은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어떤 이는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절대자라고 불렀다.
불교는 법신불이라고 말해 왔다.
동양 사상은 상제, 천지신명, 도라고 표현했다.
기독교는 성부, 성령, 로고스를 말한다.
이름은 다르다.
언어도 다르다.
문화도 다르다.
그러나 어쩌면 인류는 같은 원본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러온 것은 아닐까?
생각의 원본.
의식의 원형.
만물을 가능하게 한 첫 자리.
천봉의 질문은 바로 이 지점을 향한다.
결론: 인간은 왜 근원을 묻는가
인간은 단순히 먹고사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묻는 존재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우주는 어디서 왔는가?
생명은 어디서 왔는가?
생각은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의 지점에 이른다.
복사본 생각이 있다면 원본 생각이 있지 않을까?
인간의 의식이 있다면 원형 의식이 있지 않을까?
우주가 생각 안에서 나타난다면, 그 생각의 근원은 무엇일까?
천봉의 질문은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우주의 재료는 물질인가?
아니면 생각인가?
그리고 그 생각의 원본은 누구인가?
이 질문 앞에서 인류의 시작은 더 이상 단순한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나의 의식 안에서 다시 열리는 가장 오래된 질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 질문을 조금 더 좁혀서, “생각이 없다면 우주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필자 저서
📖 격암유록과 요한계시록의 평행우주
성경의 예언과 동양 예언서를 비교하며 인간과 의식, 미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저자의 연구서이다.
📖 세계를 재해석하는 삼중주 철학 과학 종교
철학 과학 종교의 최신 논리로 비교 분석 통합 연구서
관심 있는 독자들은 아래 링크를 참고할 수 있다.
👉 교보문고 링크
격암유록과 요한계시록의 평행우주 1 | 김영교 – 교보문고
우주의 재료는 무엇인가?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인간은 약하다.
바람에도 흔들리고, 병에도 흔들리고, 죽음 앞에서는 더욱 작아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상한 능력이 하나 있다.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늘을 보며 묻는다.
우주는 어디서 왔을까?
나는 어디서 왔을까?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어떻게 무언가가 생길 수 있었을까?
처음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을까?
우리는 흔히 말한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것도 없었다면, 무엇이 어떻게 생길 수 있었을까?
저 수많은 은하계는 처음 무엇에서 시작되었을까?
우주의 재료는 무엇이었을까?
그 재료는 어디서 온 것일까?
밖에서 수입해 온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우주 밖도 처음에는 없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더 깊어진다.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우주가 생겼는가?
무에서 유가 생긴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무”라고 부르는 그 자리에는 사실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어떤 근원이 있었던 것인가?
우리 집 삽살이와 야옹이의 시조
이 질문은 우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집 귀염둥이 삽살이도 그렇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개는 엄마 개와 아빠 개에게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 엄마 개와 아빠 개도 각각 부모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언젠가 최초의 개, 혹은 개의 시조와 만난다.
그렇다면 그 최초의 시조는 어디서 왔을까?
우리 집 야옹이도 마찬가지다.
고양이는 고양이 부모에게서 태어난다.
그 부모에게도 부모가 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고양이는 어디서 왔는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땅에서 솟았을까?
아니면 생명의 흐름 속에서 어떤 시작점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제 질문은 나에게 돌아온다.
내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부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도 그들의 부모가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다.
조부모에게도 부모가 있었다.
조상에게도 부모가 있었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최초의 시조 할아버지와 시조 할머니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그들은 누구에게서 왔는가?
그들의 부모는 누구였는가?
만약 모든 인간이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최초의 인간은 어떻게 생겼는가?
여기서 인간은 이상한 벽과 마주한다.
나의 출발은 분명 부모다.
부모의 출발은 조부모다.
조상의 출발은 또 다른 조상이다.
그런데 최초의 출발은 어디인가?
생각하지 않으면 이 질문도 없다
여기서 더 이상한 사실이 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런 질문도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파스칼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라고 한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 말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칸트가 “우리가 보는 세상은 표상이다”라고 한 연구를 하지 않고 발표하지 않았다면 그 사상은 세상에 없다.
만약 데모크리토스가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았으면 그 사상도 세상에 없을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 하지 않고 그것을 널리 알리지 않았다면 양자역학의 아직도 불확정성의 원리를 사람들은 모를 수 있다…
이 처럼,
우주의 시작도,
생명의 시작도,
인류의 시작도,
최초의 부모에 대한 질문도,
내가 생각하지 않으면 내 세계 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집 삽살이는 이런 질문을 할까?
“나는 어디서 왔을까?”
“최초의 개는 누구였을까?”
우리 집 야옹이는 이런 생각을 할까?
“우주의 재료는 무엇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묻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묻고,
우주를 묻고,
죽음을 묻고,
시작을 묻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특별함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있는 것은 아닐까?
우주는 계속 커지고 있다는데
현대 과학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주는 지금도 넓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또 질문이 생긴다.
우주가 커진다면 그 커지는 공간은 어디서 오는가?
새로운 공간의 재료는 무엇인가?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은 단순히 풍선이 커지는 것과 같을까?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 자체가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것일까?
하루하루 우주가 커지고 있다면, 그 커짐의 근원은 무엇인가?
우주 밖에서 무엇을 가져오는가?
그럴 수는 없다.
우주 밖이라는 말도 결국 인간의 생각 안에서만 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다면 우주는 존재하는가?

이제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우주가 있다고 가정하자.
별도 있고,
은하도 있고,
태양도 있고,
지구도 있다.
그런데 그 우주 안에 생각하는 존재가 단 한 명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 우주가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우주가 있어도 그것을 아는 존재가 없다면,
그 우주는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인간이 몰라도 우주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말도 결국 인간의 생각이다.
인간이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 없어도 우주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존재를 말하는 모든 진술은 생각을 통과한다.
우리가 말하는 우주는 생각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우주는 언제나 생각 안에 나타난 우주다.
흑암물질은 있는가, 없는가?
현대 과학은 우주의 대부분이 보이지 않는 물질과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아직 직접적으로 완전히 파악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발견되지 않은 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때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우선은 인간의 이론 속에 있다.
인간의 생각 속에 있다.
그런데 언젠가 발견되었다고 해보자.
그때 그것은 생각 밖으로 나가는가?
그렇지 않다.
발견되었다는 판단도 생각 안에서 이루어진다.
“있다”는 말도 생각이고,
“없다”는 말도 생각이고,
“아직 모른다”는 말도 생각이다.
이처럼 인간에게 나타나는 세계는 생각을 벗어나지 않는다.
우주는 인간 생각 밖에 있는가?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우주는 바깥에 있고,
나는 그 우주 안에 살고 있다고.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말도 생각이 만든 구조다.
내가 보는 하늘,
내가 아는 지구,
내가 말하는 우주,
내가 상상하는 빅뱅,
이 모든 것은 내 의식 안에서 나타난다.
우주가 내 몸보다 크다고 해서, 내가 아는 우주가 생각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아는 우주는 생각 안에서만 나타난다.
인간은 생각 안에서 우주를 보고,
생각 안에서 자신을 보고,
생각 안에서 신을 묻고,
생각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깥 세계를 산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생각이 구성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은 코딩되어 있는가?
우리가 외부 세계가 있다고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생각이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눈을 뜨면 바깥이 보인다.
손을 뻗으면 물체가 만져진다.
소리가 들리고, 냄새가 나고,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말한다.
“밖에 세계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감각과 판단은 생각 안에서 통합된다.
생각은 우리에게 외부 세계가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
마치 프로그램이 화면을 보여주듯이,
의식은 세계라는 화면을 펼쳐 보인다.
그러므로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단순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생각과 감각과 인식이 함께 만들어내는 하나의 장면일 수 있다.
빅뱅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이제 다시 빅뱅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빅뱅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은 누가 하는가?
생각이 한다.
아무것도 없었다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도 생각이다.
빅뱅 후에 원자가 생기고,
분자가 생기고,
세포가 생기고,
생명체가 생기고,
인간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도 생각이다.
그 모든 과정은 결국 생각 안에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빅뱅도 생각 안에서 나타난 사건이다.
원자도 생각 안에서 나타나고,
생명도 생각 안에서 나타나고,
인간도 생각 안에서 나타난다.
이 말은 우주가 단순히 상상이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 알고 말하고 해석하는 모든 우주는 생각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다.
생각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
인류가 없던 시절을 생각해 보자.
인간이 없으면 인간의 생각도 없다.
인간의 생각이 없으면, 인간이 말하는 우주도 없다.
그렇다면 인류 이전의 우주는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는 과학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때도 우주는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지금 인간이 하는 말이다.
지금 인간의 생각 안에서 과거의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에게 나타나는 과거도 생각 안에 있다.
미래도 생각 안에 있다.
우주도 생각 안에 있다.
나도 생각 안에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생각은 어디서 왔는가?
나의 생각은 원본인가, 복사본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완전한 원본일까?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모가 있었고,
조부모가 있었고,
조상이 있었다.
내 생각은 아무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부모에게서 몸을 받았고,
말을 배웠고,
세계를 배웠고,
생각하는 방식을 배웠다.
부모도 조상에게서 이어받았다.
조상도 더 오래된 조상에게서 이어받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 있는 복사본일 수 있다.
각 사람은 자기 생각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생각은 더 깊은 근원으로부터 흘러온 것일 수 있다.
최초의 생각은 어디서 왔는가?
나의 생각은 부모의 생각과 연결된다.
부모의 생각은 조상의 생각과 연결된다.
조상의 생각은 시조의 생각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시조의 생각은 어디서 왔는가?
시조에게 생각을 준 존재는 누구인가?
만약 최초의 인간에게 생각이 주어졌다면,
그 생각을 준 근원이 있을 것이다.
그 근원이 바로 생각의 원본이다.
우리는 복사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러나 복사본이 있다는 것은 원본이 있다는 단서가 된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원형이 있다는 뜻이다.
메아리가 있다는 것은 처음 소리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각 역시 어떤 원본 생각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우주의 재료는 생각인가?
여기서 천봉의 질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주의 재료는 무엇인가?
물질인가?
에너지인가?
정보인가?
아니면 생각인가?
인간이 아는 물질도 생각 안에서 나타난다.
인간이 말하는 에너지도 생각 안에서 이해된다.
정보도 생각 없이는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더 근원적인 재료는 생각일 수 있다.
생각이 먼저 있고,
그 생각 안에서 우주가 나타나고,
생명이 나타나고,
인간이 나타나고,
역사가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생각의 원본에 붙여진 이름들

인류는 오래전부터 이 원본을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왔다.
성경은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어떤 이는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절대자라고 불렀다.
불교는 법신불이라고 말해 왔다.
동양 사상은 상제, 천지신명, 도라고 표현했다.
기독교는 성부, 성령, 로고스를 말한다.
이름은 다르다.
언어도 다르다.
문화도 다르다.
그러나 어쩌면 인류는 같은 원본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러온 것은 아닐까?
생각의 원본.
의식의 원형.
만물을 가능하게 한 첫 자리.
천봉의 질문은 바로 이 지점을 향한다.
결론: 인간은 왜 근원을 묻는가
인간은 단순히 먹고사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묻는 존재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우주는 어디서 왔는가?
생명은 어디서 왔는가?
생각은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의 지점에 이른다.
복사본 생각이 있다면 원본 생각이 있지 않을까?
인간의 의식이 있다면 원형 의식이 있지 않을까?
우주가 생각 안에서 나타난다면, 그 생각의 근원은 무엇일까?
천봉의 질문은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우주의 재료는 물질인가?
아니면 생각인가?
그리고 그 생각의 원본은 누구인가?
이 질문 앞에서 인류의 시작은 더 이상 단순한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나의 의식 안에서 다시 열리는 가장 오래된 질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 질문을 조금 더 좁혀서, “생각이 없다면 우주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필자 저서
📖 격암유록과 요한계시록의 평행우주
성경의 예언과 동양 예언서를 비교하며 인간과 의식, 미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저자의 연구서이다.
📖 세계를 재해석하는 삼중주 철학 과학 종교
철학 과학 종교의 최신 논리로 비교 분석 통합 연구서
관심 있는 독자들은 아래 링크를 참고할 수 있다.
👉 교보문고 링크
격암유록과 요한계시록의 평행우주 1 | 김영교 –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