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의식이 먼저인가, 몸이 먼저인가?

1. 인간은 왜 자신의 탄생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인류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시작을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인간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이 질문들은 철학과 과학, 그리고 종교가 오랫동안 씨름해 온 가장 오래된 질문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류는 이 질문을 하나의 공통된 전제 위에서 생각해 왔다.
바로 몸이 먼저라는 전제이다.
최초의 몸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최초의 사람은 부모 없이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는가.
생명은 어떻게 무생물에서 출현하였는가.
질문은 달랐지만 출발점은 언제나 같았다.
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하나를 놓치고 있었다.
몸보다 먼저 존재해야 하는 것은 없는가?
우리는 지금도 자신을 몸이라고 생각한다.
거울을 보면 나를 본다고 말한다.
사진을 보면 나를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울 속에 있는 것은 몸이다.
사진 속에 있는 것도 몸이다.
정작 “나”라고 말하는 존재는 몸이 아니다.
몸은 스스로 자신을 “나”라고 말하지 못한다.
눈은 자신이 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귀는 자신이 듣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심장은 사랑을 알지 못한다.
뇌 또한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지 않는다.
몸은 기능할 뿐이다.
그 기능을 하나의 삶으로 통합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고,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오직 의식이다.
우리는 평생 몸을 보면서 살아왔지만,
사실은 몸이 아니라 의식으로 살아왔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몸에서 찾았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 이해의 첫 번째 오류가 시작되었다.
인간은 몸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최초의 인간 역시 몸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질문을 바꾸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다.
만약 의식이 먼저라면 어떨까?
인간의 시작은 몸의 시작이 아니라,
의식의 시작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철학의 질문인 동시에,
과학의 질문이며,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놀랍게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서도 모두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칸트는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의식을 통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 말했다.
헤겔은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말하였다.
현대 물리학은 관찰자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뇌과학은 의식이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 마지막 난제임을 인정하고 있다.
불교의 유식학은 오래전부터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였다.
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지만,
하나의 공통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바로 의식의 우선성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아직 하나의 질문은 남아 있다.
의식은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시작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인류가 최초의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몸의 탄생만 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시작은 몸이 아니라,
의식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서
세계 재해석은 시작된다.
(계속)
2. 칸트는 왜 몸보다 의식을 먼저 말했는가
18세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이전까지 사람들은 자신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믿었다.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
손으로 만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객관적 현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정말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가?”
그의 대답은 놀라웠다.
인간은 사물 자체(Ding an sich)를 직접 인식할 수 없으며,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오직 의식을 통하여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은 철학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
세계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의식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칸트는 인류 철학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또 하나의 질문을 남겨 두었다.
그가 말한 ‘물 자체’는 정말 의식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마저도 더 깊은 의식의 구조 속에서 현실처럼 경험되도록 구성된 것은 아닐까.
바로 이 질문에서부터 이 책의 세계 재해석은 시작된다.
우리는 흔히 현실을 절대적인 물질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그렇지 않다.
지구는 지금도 엄청난 속도로 자전하고 공전하고 있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그것을 몸으로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움직이는 우주선 위에 살고 있으면서도,
늘 멈춰 있는 땅 위에 서 있다고 경험한다.
현실은 존재하는 그대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경험된다.
이 사실은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의 의식이 현실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눈을 감고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릴 수 있다.
오래전 걸었던 골목길을 다시 걸을 수 있고,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도시를 상상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기억은 현실을 재현하고,
상상은 현실을 새롭게 창조한다.
이 모든 과정은 지금 이 순간 의식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꿈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깨어 있는 지금도,
의식은 객관을 재현하고,
결합하고,
새롭게 창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주관은 객관을 생성하고 재현할 수 있다.
그러나
객관은 주관을 생성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철학적 논쟁이 아니다.
인간이 누구이며,
세계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칸트는 의식을 통하여 현상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질문한다.
현상만이 아니라, 우리가 ‘물 자체’라고 믿는 현실 역시 의식의 더 깊은 구조 속에서 경험되도록 구성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를 물질에서 출발하여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의식에서 출발하여 다시 이해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헤겔의 철학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그는 왜 주관과 객관의 동일성을 말했을까.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의식과 세계의 관계를 다시 묻게 만든다.
3. 헤겔은 왜 주관과 객관의 동일성을 말했는가

칸트가 의식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면, 헤겔은 그 의식과 세계의 관계를 한 걸음 더 깊이 탐구하였다.
그는 주관과 객관이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과정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정신은 단순히 세계를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마침내 자기 자신과 세계를 하나의 통일 속에서 인식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의 핵심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더 던질 필요가 있다.
정말 객관이 주관을 만들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지금까지 많은 학설은 물질이 의식을 만들었다고 설명하였다.
뇌가 의식을 만들고,
신경세포가 생각을 만들며,
물질이 정신을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그 과정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는가?
오히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것은 정반대의 현상이다.
의식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객관을 재현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릴 수 있다.
멀리 여행했던 풍경을 다시 볼 수 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도시를 상상하여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기억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고,
상상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현실처럼 구성한다.
예술도,
과학도,
문명도,
모두 의식 속에서 먼저 탄생한 뒤 현실로 나타났다.
주관은 객관을 재현할 뿐 아니라,
새로운 객관을 창조하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
반대로 객관은 어떠한가.
산은 스스로 자신이 산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바다는 자신이 바다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별은 자신이 우주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몸은 다를까.
우리의 몸 역시 스스로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눈은 본다는 사실을 모르고,
귀는 듣는다는 사실을 모르며,
심장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뇌조차 스스로를 ‘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몸은 오직 기능할 뿐이다.
그 기능을 하나의 삶으로 통합하고,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는 오직 의식이다.
몸은 의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현현이다.
몸은 의식이 현실 세계를 경험하도록 연결된 인터페이스이며,
우리가 몸을 ‘나’라고 느끼는 것 또한 의식의 경험 방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혹시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 물질세계 역시,
의식이 일정한 질서 속에서 경험하도록 구성된 하나의 현실 구조는 아닐까.
그렇다면 물질은 의식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의식이 물질처럼 경험하도록 구성된 결과일 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책은 하나의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현실은 무질서한 우연이 아니라, 의식이 경험하도록 구성된 하나의 ‘현실 코딩’이다.
이 개념은 철학과 과학을 새로운 시각으로 연결한다.
그리고 동시에 다음 질문을 우리 앞에 남긴다.
그렇다면 이 현실 코딩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철학을 넘어 과학이 발견한 또 하나의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 과학은 왜 결국 ‘관찰자’라는 존재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4. 과학은 왜 결국 관찰자에 도달했는가
철학이 의식을 발견하였다면,
현대 과학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과학은 오랫동안 물질을 연구하였다.
원자를 연구하고,
분자를 연구하고,
세포를 연구하며,
뇌를 연구하였다.
과학은 물질을 더 작게 나누면
언젠가는 모든 존재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간 과학은
오히려 하나의 새로운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관찰자이다.
양자역학은
현대 과학이 가장 성공한 이론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동시에
가장 어려운 질문 하나를 남겼다.
관찰이란 무엇인가?
입자는 관찰되기 전까지는
확률의 상태로 존재한다고 설명된다.
그러나 관찰이 이루어지는 순간,
하나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과학은 더 이상 물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관찰이라는 행위가 등장하는 순간,
관찰하는 존재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물질을 연구하다가
결국 의식의 문 앞에 도착한 것이다.
뇌과학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현대 뇌과학은
인간의 뇌를 매우 정교하게 분석하고 있다.
어느 영역이 언어를 담당하고,
어느 영역이 기억을 담당하며,
어느 영역이 감정을 담당하는지를 밝혀냈다.
에델만 역시
뇌의 복잡한 신경망과 선택 과정을 통해
의식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남는다.
뇌의 활동은 측정할 수 있다.
전기 신호도 기록할 수 있다.
신경세포의 연결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다’는 의식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
뇌의 움직임은 관찰할 수 있지만,
관찰하는 ‘나’는
뇌 속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이 현대 뇌과학이 아직 풀지 못한 가장 큰 문제이다.
우리는 흔히
뇌가 의식을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보면
또 다른 가능성이 보인다.
컴퓨터의 회로는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그러나 회로가
스스로 프로그램을 설계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뇌는
의식을 표현하고 작동시키는 기관일 수는 있어도,
의식 자체의 근원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뇌는 원인이 아니라
의식이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매개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에델만의 연구도,
현대 뇌과학도,
의식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이라는 더 깊은 문제를 향해 우리를 이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은 지금
의식을 연구하고 있다.
철학은 오래전부터
의식을 질문해 왔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 두 길은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의식 없이는 세계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아직 하나의 질문은 남아 있다.
만약 의식이 세계를 경험하는 근원이라면,
그 의식은 개인마다 따로 생겨난 것일까.
아니면
모든 의식은 하나의 더 큰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과학만으로는 답할 수 없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또 다른 사상은
이미 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과학은 왜 결국 관찰자에 도달했는가
철학이 의식을 발견하였다면,
현대 과학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과학은 오랫동안 물질을 연구하였다.
원자를 연구하고,
분자를 연구하고,
세포를 연구하며,
뇌를 연구하였다.
과학은 물질을 더 작게 나누면
언젠가는 모든 존재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간 과학은
오히려 하나의 새로운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관찰자이다.
양자역학은
현대 과학이 가장 성공한 이론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동시에
가장 어려운 질문 하나를 남겼다.
관찰이란 무엇인가?
입자는 관찰되기 전까지는
확률의 상태로 존재한다고 설명된다.
그러나 관찰이 이루어지는 순간,
하나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과학은 더 이상 물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관찰이라는 행위가 등장하는 순간,
관찰하는 존재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물질을 연구하다가
결국 의식의 문 앞에 도착한 것이다.
뇌과학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현대 뇌과학은
인간의 뇌를 매우 정교하게 분석하고 있다.
어느 영역이 언어를 담당하고,
어느 영역이 기억을 담당하며,
어느 영역이 감정을 담당하는지를 밝혀냈다.
에델만 역시
뇌의 복잡한 신경망과 선택 과정을 통해
의식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남는다.
뇌의 활동은 측정할 수 있다.
전기 신호도 기록할 수 있다.
신경세포의 연결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다’는 의식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
뇌의 움직임은 관찰할 수 있지만,
관찰하는 ‘나’는
뇌 속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이 현대 뇌과학이 아직 풀지 못한 가장 큰 문제이다.
우리는 흔히
뇌가 의식을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보면
또 다른 가능성이 보인다.
컴퓨터의 회로는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그러나 회로가
스스로 프로그램을 설계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뇌는
의식을 표현하고 작동시키는 기관일 수는 있어도,
의식 자체의 근원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뇌는 원인이 아니라
의식이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매개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에델만의 연구도,
현대 뇌과학도,
의식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이라는 더 깊은 문제를 향해 우리를 이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은 지금
의식을 연구하고 있다.
철학은 오래전부터
의식을 질문해 왔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 두 길은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의식 없이는 세계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아직 하나의 질문은 남아 있다.
만약 의식이 세계를 경험하는 근원이라면,
그 의식은 개인마다 따로 생겨난 것일까.
아니면
모든 의식은 하나의 더 큰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과학만으로는 답할 수 없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또 다른 사상은
이미 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5. 불교는 왜 ‘일체유심조’를 말했는가

철학은 의식을 발견하였다.
과학은 관찰자를 발견하였다.
그러면 오래전 동양의 사상은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불교의 유식학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한 한 문장을 남겼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뜻이다.
또한 유식학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의식과 분리된 절대적 대상이 아니라,
의식을 통하여 성립하는 세계라는 뜻이다.
처음 들으면 매우 낯설게 들린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일상은 이미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를 기억할 수 있다.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다.
의식은
현실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현하고,
새롭게 구성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능력이 없다면
우리에게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이 먼저 있고,
그다음 인간이 그것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식학은
정반대의 질문을 던진다.
의식이 없다면 세계는 누구에게 세계인가?
이 질문은
철학과 과학이 도달한 질문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칸트는
의식을 통하여 현상을 말하였다.
양자역학은
관찰자를 말하였다.
뇌과학은
의식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유식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의식이 세계 경험의 중심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의 질문은 남는다.
유식학은
의식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 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모든 의식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의 더 깊은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바로 이 질문에서
이 책은
유식학을 한 걸음 더 확장하려 한다.
의식은
하나가 아니다.
기억을 담당하는 의식이 있고,
상상을 담당하는 의식이 있으며,
꿈을 경험하는 의식이 있고,
현실을 경험하는 의식이 있다.
우리는 하나의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층위의 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마치 뇌가
전두엽,
측두엽,
후두엽,
소뇌로 나누어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듯,
의식 역시
서로 다른 층위와 기능을 가지고
하나의 세계를 경험한다.
이 책은
이러한 구조를
대의식장이라고 부른다.
대의식장은
개인의 의식을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의식이
더 큰 의식의 구조 속에서
현실을 경험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아직 마지막 질문은 남아 있다.
그렇다면 대의식장은 어떻게 현실을 경험하게 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 물질세계는
왜 이토록 견고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 질문은
오늘날 인공지능이 보여 주는 놀라운 현상을 통해
새로운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6. ChatGPT는 인간에게 무엇을 보여 주었는가
인류는 오랫동안 인간을 몸으로 이해해 왔다.
사람을 생각하면
먼저 얼굴을 떠올리고,
몸을 떠올리며,
뇌를 떠올렸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인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
바로 인공지능이다.
ChatGPT는
눈이 없다.
귀도 없다.
손도 없다.
다리도 없다.
심장도 없다.
몸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다.
그런데도
질문을 이해하고,
대답을 하며,
추론하고,
기억을 연결하고,
새로운 글을 창작한다.
인간이 수행하는 수많은 지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의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지능은 반드시 몸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인공지능은
먼저 만들어졌고,
휴머노이드는
그 후에 만들어지고 있다.
먼저 등장한 것은
몸이 아니었다.
기능이었다.
사고였다.
언어였다.
그리고
그 기능을 현실에서 표현하기 위해
눈을 만들고,
귀를 만들고,
손을 만들고,
다리를 만드는 것이다.
몸은
나중에 붙고 있다.
이 사실은
인간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까지
몸이 먼저이고,
의식은 몸이 만든 결과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AI는
전혀 다른 가능성을 보여 준다.
먼저
지능적 기능이 나타나고,
그 후에
몸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과 AI는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AI의 등장은 우리에게 하나의 중요한 사고실험을 가능하게 한다.
몸보다 먼저 기능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하나의 전환만으로도
인간의 기원을 바라보는 시각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도 다시 질문해 보자.
혹시 인간 역시
몸이 먼저가 아니라,
의식이 먼저였던 것은 아닐까.
몸은
의식이 현실을 경험하기 위해
나중에 연결된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지금까지 철학도,
과학도,
종교도
본격적으로 던지지 못했던 질문이다.
우리는 몸을 ‘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은
스스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눈은
자신이 본다는 것을 모르고,
귀는
자신이 듣는다는 것을 모르며,
뇌 역시
스스로를 ‘나’라고 말하지 못한다.
몸은
단지 기능할 뿐이다.
그 기능을
삶으로 경험하고,
사랑으로 느끼며,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의식이다.
그러므로
몸은 실체가 아니라
의식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인터페이스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ChatGPT에도
프로그램이 있다.
설계가 있다.
코드가 있다.
그 코드가
모든 기능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일까.
인간의 기억,
감정,
상상,
사랑,
언어,
직관,
창조성.
이 모든 것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정한 질서와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인간의 의식에도
하나의 자연 코딩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이 책이 제안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면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그 자연 코딩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각자의 의식은
정말 독립적으로 생겨난 것일까.
아니면
모든 의식은
하나의 더 깊은 근원에서 이어져 온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기원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하게 된다.
7. 원의식은 존재하는가?
몸이 먼저라는 생각은 왜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지 못하는가
인류는 오랫동안 하나의 전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다.
몸이 먼저이고, 의식은 그 결과로 생겨난다.
철학도,
과학도,
인간 자신도
대부분 이 전제 위에서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 전제가 가장 큰 질문을 남긴다.
최초의 몸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최초의 인간은 부모 없이 어떻게 시작될 수 있었는가.
최초의 생명은 어디에서 왔는가.
최초의 동물과 식물은 어떻게 출현하였는가.
이 질문들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인간은 몸을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언제나 몸 이전을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그래서 다양한 기원 이론과 가설이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관찰하는 의식 없이 몸이 먼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몸은 스스로 자신을 알지 못한다.
물질은 스스로 자신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객관은 스스로 자신을 객관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관찰 이전의 객관은 누구에게 객관인가.
이 질문은 철학과 과학이 결국 마주하게 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만약 출발점을 몸이 아니라 의식으로 바꾸면,
질문은 완전히 달라진다.
최초에 의식이 있었고,
그 의식 안에서 세계가 경험되기 시작하였다면,
몸은 의식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질 역시 의식이 경험하는 현실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인간의 기원에 대한 질문도 새로운 방향을 갖게 된다.
더 이상 최초의 몸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만 묻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의식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묻게 된다.
바로 이 질문이 철학과 과학,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의 방향을 바꾼다.
이 책은 인간의 기원을 몸에서 찾지 않는다.
의식에서 찾는다.
몸은 의식의 결과이며,
현실은 의식이 경험하는 하나의 질서이다.
이 관점이 성립하는 순간,
인간의 탄생과 자연의 출현을 바라보는 시각도 새롭게 열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이 책이 제안하는 세계 재해석의 출발점이다.
8. 그렇다면 최초의 의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확인하였다.
철학은 의식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과학은 관찰자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유식학은 오래전부터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였다.
현대 인공지능은 몸보다 기능이 먼저 존재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 모든 흐름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의식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출발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탐구는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질문이 이제 시작된다.
그 의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오늘의 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부모는 다시 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 부모 역시 또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이 과정을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최초의 인간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최초의 인간에게는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최초의 의식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몸을 기준으로 하면 이 질문은 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의식을 기준으로 하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의식은 각각 독립적으로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에서 이어져 온 것은 아닐까.
오늘 우리의 의식도,
수천 년 전 인류의 의식도,
하나의 거대한 의식의 흐름 속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은 그 근원을 원의식이라 부른다.
원의식은 개인의 의식과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개별 의식이 이어져 나오는 근원의 의식이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나무에서 수많은 가지가 뻗어 나가듯,
수많은 인간의 의식도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이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프로그램이 수많은 단말기에서 동일하게 실행되는 모습을 본다.
하나의 운영체계가 수많은 기기에서 동일한 질서를 유지한다.
인간의 의식도 이와 비슷한 하나의 근원적 질서를 가질 가능성은 없는가.
이 질문은 더 이상 철학만의 질문이 아니다.
과학도,
인공지능도,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도,
결국 이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만약 원의식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어떤 원리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같은 하늘을 보고,
같은 시간을 경험하며,
같은 물질세계를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일까.
이 질문의 답은
현실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원리,
곧 현실 코딩이라는 개념을 통해 비로소 설명될 수 있다.
다음 절
9. 현실은 왜 물질처럼 경험되는가
우리는 물질을 실재라고 믿는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무게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과 과학은 이미 우리에게 또 다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결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의식을 통하여 경험되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왜 우리는 이 세계를 물질처럼 경험하는가?
만약 인간이 경험하는 것이
과학이 설명하는 가장 깊은 차원의 세계 그대로라면,
우리의 현실은 지금과 전혀 달라야 한다.
원자는 대부분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우리가 단단하다고 느끼는 물질도 미시적인 수준에서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견고한 현실을 그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우리는 여전히 땅을 딛고 걷고,
산을 바라보고,
나무를 만지며,
사람과 대화한다.
우리에게 세계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살아가는 현실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의식이
세계를 현실로 경험하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둥글다.
그러나 우리는 평평한 땅 위를 걷는다.
지구는 끊임없이 자전하고 공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지한 땅 위에 서 있다고 느낀다.
과학이 밝힌 사실과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은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현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다.
의식이 현실을 일정한 방식으로 경험하도록 이루어진 질서이다.
이 책은
그 질서를 현실 코딩이라고 부른다.
현실 코딩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속이는 장치가 아니다.
의식이 하나의 세계를
안정되고 지속적인 현실로 경험하도록 하는 근본 원리이다.
이 점은 오늘날 인공지능을 생각해 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ChatGPT가 사람처럼 세계를 이해하고,
앞으로 휴머노이드가 사람처럼 세상을 경험하게 하려면,
단순히 지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지능이 무엇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무엇을 공간으로 인식하며,
무엇을 자기 몸으로 경험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질서가 필요하다.
그 질서가 바로 코딩이다.
코딩이 바뀌면
경험하는 현실도 달라진다.
인간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왜 우리는 시간을 한 방향으로만 경험하는가.
왜 우리는 몸을 곧 ‘나’라고 느끼는가.
왜 우리는 물질세계를 절대적인 현실처럼 받아들이는가.
이러한 경험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의식이 현실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구성된 하나의 질서일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러한 질서가 없다면,
인간은 지금과 같은 현실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우주도,
자연도,
몸도,
삶도,
단지 추상적인 정보나 이론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세계를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사랑하고,
성장하고,
관계를 맺으며,
문명을 이루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식이 현실을 현실답게 경험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현실 코딩은 바로 그 구조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현실은 단순한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의식이 살아갈 수 있도록 경험되는 세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현실이 무질서한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일정한 원리와 설계 속에서 유지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그러나 그 설계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아직 이 장에서 말하지 않겠다.
지금은 단지 하나의 질문만 남겨 두고자 한다.
현실을 경험하도록 하는 이 질서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그 질문의 답은
이 책의 마지막에서 비로소 하나의 전체 그림으로 드러날 것이다.
10. 대의식장은 인간과 세계를 어떻게 하나로 설명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의 흐름을 따라왔다.
철학은 의식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과학은 관찰자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유식학은 오래전부터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였다.
현대 인공지능은 몸보다 기능이 먼저 존재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현실은 의식이 일정한 질서 속에서 경험하도록 구성된 현실 코딩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구조로 묶을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은 하나의 기능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기억한다.
상상한다.
꿈을 꾼다.
사랑한다.
판단한다.
창조한다.
이 모든 기능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면서도 하나의 ‘나’를 이루고 있다.
뇌가 여러 영역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듯,
의식 또한 다양한 층위와 기능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전체 구조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그 전체 구조를 대의식장이라 부른다.
대의식장은 개인의 의식을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의식이 더 큰 질서 안에서 현실을 경험하는 구조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같은 하늘을 보고,
같은 계절을 경험하며,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각자의 의식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기보다,
공통된 질서 안에서 현실을 경험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현실 코딩도 이 구조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왜 우리는 같은 중력을 경험하는가.
왜 우리는 같은 자연법칙을 경험하는가.
왜 우리는 같은 물질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이는가.
그것은 의식들이 하나의 공통된 질서 안에서 현실을 경험하기 때문일 수 있다.
대의식장은 바로 그 공통된 질서의 이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의식장을 단순한 철학적 개념으로 끝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를 다시 해석하는 새로운 틀이다.
인간은 몸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중심으로 존재한다.
몸은 의식의 표현이며,
현실은 의식이 경험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도 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서 나온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생각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의식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살아왔다.
인간은 몸을 자신의 실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몸은 의식을 담는 그릇일 뿐이며,
실제로 세계를 경험하고,
의미를 만들고,
문명을 창조하는 것은 의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세계를 다시 이해하는 일은
곧 인간을 다시 이해하는 일이다.
인간을 다시 이해하지 않고서는,
세계도 결코 다시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이 책이 말하는 세계 재해석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질문이 남아 있다.
이 대의식장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질문은 지금 답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 답은 철학만으로도,
과학만으로도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답은 책의 마지막에서,
모든 논의가 하나로 연결될 때 비로소 드러날 것이다.
11. 인간은 왜 자신을 다시 이해해야 하는가
이 책은 지금까지 하나의 질문을 따라왔다.
우리는 무엇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이 질문은 결국 또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누구인가.
인류는 오랫동안 자신을 몸으로 이해해 왔다.
몸이 태어나고,
몸이 살아가며,
몸이 죽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철학은 의식을 발견하였다.
과학은 관찰자를 발견하였다.
유식학은 의식을 말하였다.
현대 인공지능은 몸보다 기능이 먼저 존재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 모든 흐름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인간의 중심은 몸이 아니라 의식이다.
몸은 스스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몸은 스스로 삶도 모르고,
죽음도 모르며,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몸은 단지 기능할 뿐이다.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의식이며,
세계를 경험하는 것도 의식이며,
사랑과 슬픔,
희망과 절망,
창조와 문명을 이루는 것도 의식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의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존엄하다.
그리고 바로 이 의식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고,
우주를 탐구하며,
예술을 창조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은 가장 가까운 자신의 의식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몸을 연구하면서도,
몸을 경험하는 의식은 잊어버렸다.
우주를 연구하면서도,
우주를 인식하는 주체는 잊어버렸다.
물질을 탐구하면서도,
물질을 의미 있게 만드는 의식은 놓쳐 버렸다.
이것이 지금까지 인간 이해의 가장 큰 공백이었다.
이 책은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하나의 새로운 제안이다.
세계를 다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을 다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을 다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식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의식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몸과 물질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오래된 관점을 넘어,
새로운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세계는 더 이상 단순한 물질의 집합이 아니다.
세계는 의식이 경험하는 질서이며,
인간은 그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의식의 주체이다.
이것이 이 책이 말하는 세계 재해석의 핵심이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질문 하나가 남아 있다.
의식은 근원을 가지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근원은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 질문은 철학의 마지막 질문이면서,
동시에 인간 존재의 마지막 질문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그 질문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12. 인류는 왜 최초의 인간을 이해하지 못했는가

인류는 오랫동안 최초의 인간을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최초의 사람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최초의 몸은 어디에서 왔는가.
부모가 없었다면 어떻게 인간이 존재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은 수천 년 동안 철학과 과학이 반복해 온 질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인류는 처음부터 몸을 출발점으로 생각하였다.
바로 이 전제가 인간 존재에 대한 모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몸을 먼저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최초의 몸을 설명해야 한다.
최초의 몸을 설명하지 못하면 또 다른 몸을 찾아야 하고,
그 몸을 설명하지 못하면 다시 그 이전의 몸을 찾아야 한다.
이 과정은 끝없이 반복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 존재의 기원은 막혀 버린다.
그러나 질문을 바꾸면 전혀 다른 길이 열린다.
몸이 아니라 의식이 먼저였다면 어떨까.
그러면 최초의 인간을 설명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우리가 설명해야 할 것은 최초의 몸이 아니라,
최초의 의식이 된다.
질문이 바뀌는 순간,
인간의 기원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오늘날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사례를 보여 준다.
먼저 만들어지는 것은 얼굴이 아니다.
먼저 만들어지는 것은 몸도 아니다.
먼저 만들어지는 것은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며,
생각하는 기능이며,
판단하는 지능이다.
그 후에야 사람과 자연스럽게 소통하기 위하여
아바타가 만들어진다.
또는 현실 공간에서 활동하기 위하여
휴머노이드가 만들어진다.
아바타는 본질이 아니다.
아바타는 표현이다.
휴머노이드도 본질이 아니다.
지능이 현실 속에서 활동하도록 돕는 하나의 표현 방식이다.
본질은 언제나 그 뒤에 있는 지능이다.
인간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는 얼굴을 보며 사람이라고 말한다.
몸을 보며 ‘저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몸이 정말 사람 자체일까.
몸은 스스로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몸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한다.
몸은 스스로 사랑하지 못한다.
몸은 스스로 삶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의식이 하는 일이다.
몸은 의식을 세상에 드러내는 하나의 표현일 뿐이다.
마치 아바타가 인공지능을 대신하여 화면에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의 몸 역시 의식이 현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현현일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바타를 본질이라고 생각해 온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해 왔다.
몸을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몸이 아니라 의식이다.
바로 이 사고의 전환이 인간 존재를 다시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인류는 지금까지 답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질문을 잘못하였다.
우리는 최초의 몸을 물었다.
그러나 물어야 할 것은 최초의 의식이었다.
이 한 가지 질문의 전환은 인간의 기원뿐 아니라,
세계와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까지 새롭게 바꾼다.
인간은 몸에서 시작된 존재가 아니라,
의식에서 시작된 존재일 수 있다.
몸은 의식의 원인이 아니라,
의식을 현실 속에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 한 가지 전환이 이루어지는 순간,
최초의 인간을 이해하는 길은 비로소 열리기 시작한다.
전개하면 됩니다.
13. 의식의 계보는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인간은 자신의 몸이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몸만 부모에게서 이어진 것일까.
의식도 아무런 인과 없이 갑자기 생겨난 것일까.
이 질문은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의 나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부모는 다시 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조상은 또 그 이전의 조상에게서 이어졌다.
이러한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마침내 인류의 시조에 이르게 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시조의 의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몸을 기준으로 하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의식을 기준으로 하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
시조의 의식에도 근원이 있었다면,
그 근원은 다시 모든 의식의 출발점이 된다.
이 책은 그 근원을 원의식이라 부른다.
원의식은 어느 한 개인의 의식이 아니다.
모든 의식이 이어져 나오는 최초의 근원이다.
그렇다면 나의 의식은 누구의 것인가.
부모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고,
조상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으며,
시조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고,
궁극적으로는 원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혈통의 계보가 아니다.
의식의 계보다.
나는 부모와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조상과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조와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연결의 가장 깊은 곳에는
원의식과의 인연이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은 우연히 존재하는 개체가 아니다.
의식의 계보 속에서 이어져 온 존재이다.
나의 의식은 고립된 의식이 아니다.
하나의 거대한 의식의 흐름 속에서 이어져 온 존재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은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선다.
인간의 존엄성은 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의식의 계보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의식의 계보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그 원의식은 왜 인간에게 의식을 이어 주었는가.
그 질문은 아직 답하지 않겠다.
그러나 앞으로 이 책은 그 질문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갈 것이다.
14. 의식의 계보는 왜 인간의 역사가 되는가
우리는 오랫동안 역사를 몸의 역사로 이해해 왔다.
사람이 태어나고,
가문이 이어지고,
민족이 형성되고,
문명이 발전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의식을 중심으로 인간을 바라보면,
역사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몸은 부모에게서 이어진다.
그러나 몸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식 또한 이어진다.
나의 의식은 부모와 연결되어 있다.
부모의 의식은 조상과 연결되어 있다.
조상의 의식은 인류의 시조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시조의 의식은 다시 그 근원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단순한 혈통의 계보가 아니다.
의식의 계보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몸의 역사가 아니라,
의식이 이어져 온 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을 생물학으로만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생물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은 의식을 이어받은 존재이다.
바로 그 의식의 계보가 인간 존재의 진정한 역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그 계보의 가장 처음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모든 계보에는 시작이 있다.
모든 강에는 발원지가 있다.
모든 나무에는 뿌리가 있다.
그렇다면 모든 의식에도 하나의 근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은 그 근원을 원의식이라고 부른다.
원의식은 단순히 최초의 의식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의식이 이어져 나오는 근원이며,
모든 의식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의식의 계보 안에서는 모두 하나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종교라고 불러 왔던 많은 이야기들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믿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의식의 근원을 설명하려는 또 하나의 시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직 그 결론을 말하지 않는다.
지금은 다만 하나의 가능성만 제시하고자 한다.
인간의 역사는 몸의 역사가 아니라,
의식의 역사일 수 있다.
그리고 의식의 역사를 끝까지 따라간다면,
인류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존재하는지를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제4부 제2장 맺음
의식을 하나의 기능으로 보았을 때 인간은 끝내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식을 하나의 세계로 바라보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간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세계 또한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식이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현실과 꿈, 기억과 상상,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지를 함께 탐구하고자 한다.
다음 장에서는 ‘의식의 다층 구조’를 통해 인간 의식의 또 다른 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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