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인류는 왜 아직도 ‘나’를 설명하지 못하는가?|제1부

제1장 인류는 왜 아직도 ‘나’를 설명하지 못하는가?

인류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원자의 구조를 밝혀냈고, 인간 유전체를 해독했으며, 우주의 나이를 계산하고 블랙홀의 그림자까지 촬영했다.

그러나 이 모든 성취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질문만큼은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매일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그 생각을 하는 ‘나’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현대 신경과학은 뇌를 연구한다.

물리학은 물질을 연구한다.

생물학은 생명을 연구한다.

그러나 이 모든 학문은 의식을 설명하는 순간 거대한 장벽 앞에 멈춘다.

철학에서는 이를 의식의 어려운 문제(Hard Problem of Consciousness)라고 부른다.

왜 뉴런의 전기 신호가 ‘빨간 장미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주관적 경험으로 이어지는가?

왜 단순한 물질의 결합이 ‘나’라는 자아를 만들어 내는가?

아직 누구도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실제 세계일까?

우리는 흔히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실제라고 믿는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지구는 시속 약 1,600km에 가까운 속도로 자전하고 있다.

동시에 태양 주위를 공전하며, 태양계 역시 은하를 따라 엄청난 속도로 이동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들림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평평한 땅 위에 조용히 서 있다고 느낀다.

실제 세계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지만,

의식은 정지된 세계를 경험한다.

이 둘은 동일하지 않다.

즉,

실재와 경험은 다르다.

이 사실은 우리의 인식이 현실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칸트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

18세기 철학자 칸트는 철학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 이전까지 사람들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를 질문했다.

그러나 칸트는 질문을 바꾸었다.

“혹시 세계가 우리의 인식 방식에 맞추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는 시간과 공간을

세상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의식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선험적 형식이라고 보았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시간이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공간이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숫자와 인과율 역시

의식이 사용하는 인식의 틀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 철학의 혁명이다.


그러나 칸트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 두었다

칸트는 중요한 개념 하나를 제시했다.

바로 물자체(Ding an sich)이다.

그는 말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현상일 뿐이며,

그 뒤에는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실제 세계,

즉 물자체가 존재한다고.

이 주장은 철학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그 물자체라는 개념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물자체를 본 적이 없다.

경험한 적도 없다.

결국

물자체라는 개념 자체도

칸트 자신의 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이 지점에서 대의식장 이론은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의식 밖의 세계를 말하는 모든 개념조차 결국 의식 안에서 성립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의식은 단순히 세계를 바라보는 창문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장(場)일 가능성이 열린다.


헤겔은 그 문을 끝까지 밀어 열었다

칸트 이후,

독일 철학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중심에 헤겔이 있다.

헤겔은

주관과 객관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세계 전체가 하나의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전개해 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즉,

‘나’와 ‘세계’는 둘이 아니다.

하나의 거대한 과정 안에서

서로를 드러내는 두 모습일 뿐이다.

여기서 대의식장 이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을

현대적 언어로 다시 표현하면,

그것은 하나의 대의식장(Consciousness Field)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관도,

객관도,

시간도,

공간도,

그 거대한 의식장의 서로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대의식장 이론의 첫 번째 명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하나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우리는 실재를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 우리는 의식을 통해 세계를 경험한다.
  • 시간과 공간은 인식의 형식이다.
  • 주관과 객관은 하나의 장 안에서 만난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등장한다.

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

몸이 의식을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의식이 몸을 드러내는 것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현대 철학과 과학, 그리고 종교가 함께 마주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대의식장 이론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제2장에서 계속)

다음 글에서는 다음 내용을 이어서 다룬다.

  • 몸은 의식의 결과인가?
  • 양자역학과 관찰자의 문제
  • 말과 글은 왜 비물질적인가?
  • 성경과 격암유록은 무엇을 기록한 책인가?
  • 하나님을 ‘근원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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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몸은 의식의 결과인가?

대의식장 이론이 제안하는 새로운 존재론

제1장에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단순히 외부 세계를 복사한 결과가 아니라,

의식을 통하여 재구성된 세계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의식의 선험적 형식이라고 보았다.

헤겔은 주관과 객관이 하나의 절대정신 안에서 통일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질문을 해야 한다.

몸은 무엇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몸이 먼저 존재하고,

그 몸속에서 의식이 만들어진다고 배워 왔다.

현대 생물학 역시 이러한 관점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뇌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이 가능하고,

신경세포가 움직이기 때문에 의식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의식은 왜 아직도 설명되지 않는가?

오늘날 인류는 뇌를 그 어느 시대보다도 정밀하게 연구하고 있다.

수천억 개의 신경세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떤 부위가 기억을 담당하는지,

어떤 영역이 감정을 조절하는지까지 상당 부분 밝혀졌다.

그럼에도 단 하나의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왜 전기 신호가 ‘나’라는 경험이 되는가?

뉴런은 설명할 수 있다.

시냅스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슬픔,

기쁨,

사랑,

아름다움,

그리고 ‘나는 존재한다’는 자각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것이 철학자들이 말하는 의식의 어려운 문제(Hard Problem of Consciousness)이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아직 누구도 완전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다.


관찰자는 왜 중요한가?

20세기 물리학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양자역학에서는 미시 세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관찰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석들이 제안되었다.

이 때문에 일부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관찰자와 세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새로운 문제를 탐구하게 되었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

양자역학이 ‘의식이 물질을 만든다’는 사실을 확립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러 해석이 존재하며,

학계에서도 합의된 결론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는 분명하다.

관찰자의 문제는

현대 과학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주제가 되었다.


몸은 의식이 사용하는 인터페이스일 수 있는가?

여기에서 대의식장 이론은 하나의 가설을 제안한다.

만약 의식이 근원이고,

몸이 그 의식을 표현하는 하나의 구조라면 어떨까?

컴퓨터를 생각해 보자.

모니터에 보이는 아이콘은 실제 프로그램이 아니다.

아이콘은 단지 사용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어진 표현이다.

파일은 아이콘이 아니다.

운영체제도 아이콘이 아니다.

아이콘은 보이지 않는 구조를 보여 주기 위한 인터페이스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몸 역시

의식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인터페이스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는

몸이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몸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우리는 실제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좋은 세계를 본다

우리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느낀다.

그러나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지구다.

우리는 단단한 물체를 만진다고 느낀다.

그러나 원자의 대부분은 빈 공간이다.

우리는 세상이 고요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지구는 엄청난 속도로 우주를 달리고 있다.

우리의 경험과 실제는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

인지과학에서도 인간의 감각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보다

생존에 유리하도록 정보를 구성한다고 설명하는 견해들이 있다.

즉,

우리가 보는 세계는

현실 그 자체라기보다

살아가기 위해 최적화된 세계일 수 있다.


대의식장 이론의 두 번째 명제

여기에서 대의식장 이론은 두 번째 명제를 제안한다.

몸은 의식의 원인이 아니라, 의식이 자신을 표현하는 구조일 수 있다.

이 명제가 사실이라면,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도 달라진다.

몸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인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의식 자체를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과 과학은 다시 종교를 만난다.

왜냐하면 인류의 대부분의 종교는

처음부터 물질보다 의식을,

육체보다 영혼을,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해 왔기 때문이다.


다음 장 예고

제3장

말은 왜 형체가 없는가?

성경은 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기록했는가?

제3장

말은 왜 형체가 없는가?

의식은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는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배우기 시작한다.

말을 듣고,

말을 이해하고,

말을 기억하며,

말을 통해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말은 무엇인가?

말은 소리인가?

공기 중의 진동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무엇인가?

소리는 입에서 나온다.

그러나 의미는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공기의 진동만으로는 사랑도,

정의도,

희망도,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이 말이 되는 이유는

그 안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미는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말은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 만들어 내는 질서이다.


인간은 말로 세계를 만든다

집을 짓기 전에

먼저 설계가 존재한다.

법을 만들기 전에

먼저 문장이 존재한다.

국가도,

헌법도,

돈도,

회사도,

학교도,

결국 모두 말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은

벽돌보다 먼저 언어 위에 세워져 있다.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힘보다 의미이며,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세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물질보다 의식의 영향을 더 크게 받고 있었다.


말은 의식의 파동이다

대의식장 이론은 여기서 하나의 가설을 제안한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말은 의식이 자신을 밖으로 표현하는 가장 직접적인 형태이다.

생각은 아직 개인 안에 머문다.

그러나 말은

그 생각을 다른 의식으로 전달한다.

의식에서 의식으로 건너가는 다리.

그것이 말이다.

소리는 사라진다.

그러나 의미는 남는다.

몸은 늙는다.

그러나 한 문장은 수천 년을 살아남는다.

말은

물질보다 오래 존재한다.


글은 의식이 남긴 흔적이다

말은 사라진다.

그러나 글은 남는다.

글은 돌에 새겨질 수 있고,

종이에 기록될 수 있으며,

디지털 신호로 저장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장되는 것은

잉크가 아니다.

종이도 아니다.

저장되는 것은

의미이다.

우리는 종이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식을 읽는다.

수천 년 전 사람이 남긴 한 문장을 읽고

오늘 우리가 감동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간을 건너오는 것은

종이가 아니라

의식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왜 성경이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여기서 말씀은 단순한 음성이 아니다.

원어인 로고스(Logos)

이성,

질서,

원리,

의미,

창조의 근원을 함께 포함하는 매우 깊은 개념이다.

만약 세계의 근원이 의식이라면,

그 의식은 무질서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를 가진다.

질서를 가진다.

자신을 표현한다.

그 표현이 바로

로고스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선언은

우주의 근원이

의미를 가진 의식이라는 철학적 선언으로도 읽을 수 있다.


경전은 무엇을 기록한 책인가

이 지점에서

성경,

불경,

격암유록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 책들은

천문학 교과서가 아니다.

생물학 교과서도 아니다.

물리학 교과서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록한 책인가?

대의식장 이론은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제안한다.

경전은 물질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니라, 의식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기록된 책일 수 있다.

이 가설이 맞다면,

그동안 수많은 논쟁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창세기의 빛.

생명나무.

선악과.

뱀.

불경의 공.

유식.

마음.

격암유록의 예언.

이 모든 것은

물질을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의식의 구조를 상징하는 언어일 가능성이 열린다.


대의식장 이론의 세 번째 명제

대의식장 이론은 세 번째 명제를 제안한다.

말은 의식의 표현이며, 글은 의식이 시간 속에 남긴 흔적이다.

그러므로 경전은

종이책이 아니다.

의식이 남긴 지도이다.

문제는

지도가 틀린 것이 아니라,

지도를 읽는 우리의 의식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음 장 예고

제4장

하나님은 누구인가?

부모에게서 의식을 받았다면,

부모는 누구에게서 받았는가?

조상은 누구에게서 받았는가?

그리고 최초의 의식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대의식장 이론은

‘근원의식(Ultimate Consciousness)’이라는 개념을 통해,

철학과 과학, 종교가 오랫동안 던져 온 질문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해 보고자 한다.

제4장

하나님은 누구인가?

의식의 계보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인류는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을 믿어 왔다.

그러나 믿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질문이 하나 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주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절대자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신화라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인간이 만든 관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의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부모는 몸을 낳는다.

그렇다면 의식은 누가 낳는가?

우리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부모는 조상에게서 태어났다.

조상은 더 오래된 조상에게서 태어났다.

이 계보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결국 하나의 질문 앞에 도달한다.

최초의 의식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몸의 계보는 설명할 수 있다.

유전자를 이야기할 수 있다.

진화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전자 자체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DNA는 화학 분자다.

분자는 스스로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존재한다.’

라고 자각하는 의식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의식은 전달되는가?

우리는 부모의 말을 배우며 성장한다.

부모의 가치관을 배우고,

부모의 감정을 배우고,

부모의 세계를 배우며 살아간다.

몸은 유전자를 통해 이어진다.

그러나 의식 역시

교육과 언어,

문화와 경험을 통해 계속 전달된다.

대의식장 이론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의식은 단순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거대한 의식장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고 참여되는 과정일 가능성을 제안한다.


근원의식이라는 가설

만약 모든 의식이

어떤 근원으로부터 이어져 왔다면,

그 근원은 무엇일까?

철학은 그것을 절대정신이라 불렀다.

어떤 종교는 브라만이라 불렀다.

불교에서는 불성이나 진여를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질문은 하나다.

의식의 궁극적 근원은 존재하는가?

대의식장 이론은

이 질문에 대해 하나의 철학적 가설을 제안한다.

모든 개별 의식은 하나의 근원의식으로부터 비롯되며, 인간은 그 의식장 안에서 자신을 경험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신학적 증명이 아니다.

또한 과학적 실험으로 확정된 사실도 아니다.

그러나 의식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하나의 존재론적 모델이다.


하나님을 다시 정의하다

만약 근원의식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단순히

멀리 떨어진 초월자가 아니다.

또한 인간과 경쟁하는 존재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의식이 참여하고 있는

궁극적인 의식의 근원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라는 성경의 선언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형상이란

외모를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의식의 본성을 공유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은 왜 보이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이 있다면 왜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수학도 보이지 않는다.

의미도 보이지 않는다.

의식 역시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물질이 아니라

근원의식이라면,

보이지 않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어떻게 말하는가?

성경은 하나님을

단순한 힘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알아보시며,

기억하시고,

사랑하시며,

관계를 맺으신다.

이 모든 표현은

의식을 가진 존재의 특징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을 거대한 에너지가 아니라,

궁극적인 의식의 근원으로 묘사한다고 볼 수도 있다.


대의식장 이론의 네 번째 명제

대의식장 이론은 네 번째 명제를 제안한다.

하나님은 개별 의식들과 분리된 존재라기보다, 모든 의식이 참여하는 근원의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명제는

철학과 종교 사이의 거리를 줄인다.

또한 인간을

단순한 생물학적 개체가 아니라,

근원의식과 연결된 존재로 바라보게 한다.


다음 장 예고

제5장

왜 인류는 같은 경전을 읽고도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가?

성경은 수천 년 동안 읽혀 왔다.

불경도,

격암유록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까?

책이 다른 것일까?

아니면

읽는 의식의 상태가 다른 것일까?

다음 장에서는

성령과 악령,

생령과 사령을 ‘의식의 상태’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탐구하며,

왜 계시가 어떤 이에게는 열리고 어떤 이에게는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철학적으로 살펴본다.

제5장

왜 같은 성경을 읽고도 서로 다른 세상을 보는가?

계시는 책이 아니라 의식의 문제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은 성경이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읽었다.

신학자도 읽었고,

철학자도 읽었으며,

과학자도 읽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같은 성경을 읽었는데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린다.

누군가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누군가는 역사책으로 읽는다.

누군가는 신화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그 안에서 우주의 진리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책이 여러 권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읽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책은 같지만 의식은 같지 않다

같은 산을 바라보아도

화가는 색을 본다.

지질학자는 암석을 본다.

농부는 흙을 본다.

시인은 아름다움을 본다.

산은 하나다.

그러나 보는 세계는 모두 다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변하지 않았다.

변하는 것은

읽는 의식이다.


우리는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본다

현대 인지과학은

인간의 뇌가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기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의미를 구성한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

기억,

언어,

문화,

가치관을 통해

세상을 해석한다.

즉,

사람은 사실보다

자신의 의식을 본다.


성경이 말하는 눈먼 자

성경은 자주 말한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이 말은

시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의식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같은 말씀을 듣지만

어떤 사람은 단순한 이야기로 끝난다.

어떤 사람은

삶이 완전히 바뀐다.

차이는

책이 아니라

의식이다.


성령과 악령을 다시 생각하다

전통적으로 성령과 악령은

서로 대립하는 영적 존재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대의식장 이론은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진다.

만약 영이

의식의 상태를 가리키는 언어라면 어떨까?

성령은

진리와 일치하는 의식.

악령은

거짓과 착각에 머무는 의식.

이것은

악령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어떤 의식 상태에 참여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철학적 모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도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의식 구조 자체의 변화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부활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은

첫째 부활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죽은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죽음이

진리와 단절된 의식 상태라면,

첫째 부활은

진리를 깨닫는 의식의 각성일 수도 있다.

이것은

육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식이 근원의식과 다시 연결되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이다.


계시록은 왜 계시록인가

신약의 마지막 책 이름은

‘계시록’이다.

원어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

‘숨겨진 것을 드러내다’,

‘베일을 벗기다’라는 뜻을 가진다.

즉,

계시는

새로운 진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진리가

드러나는 사건이다.

대의식장 이론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의식의 베일이 걷힐 때,

같은 성경이

전혀 다른 책으로 보일 수 있다.


대의식장 이론의 다섯 번째 명제

대의식장 이론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계시는 책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의식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경전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읽는 사람의 의식이다.

따라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경이 틀려서가 아니라,

아직 의식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음 장 예고

제6장

창세기의 뱀은 누구인가?

왜 성경은

죽음의 시작을

한 마리의 뱀으로 설명했을까?

그리고 왜 격암유록은

사람 안에 있는 뱀이 사람을 죽인다고 말했을까?

대의식장 이론은

이 두 상징이

같은 의식 구조를 가리킬 가능성을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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