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ㅣ제2장 시간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부제 시간은 물질의 속성이 아니라 의식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다.

제5부 제2장 시간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시간·숫자·공간과 의식을 통합한 대의식장이론 철학 일러스트

1.우리는 시간을 본 적이 있는가?

인간은 시간을 가장 익숙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침이 오면 하루가 시작되고,

해가 지면 하루가 끝난다고 믿는다.

시계를 보며 약속 시간을 정하고,

달력을 보며 한 해가 지나갔다고 말한다.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시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를 던져 보자.

당신은 지금까지 시간을 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은 당연히 보았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나타난다.

우리는 시계를 본다.

달력을 본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본다.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본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시간 자체를 본 적은 없다.

시계 안에는 바늘이 움직일 뿐이다.

달력에는 숫자가 바뀔 뿐이다.

태양은 위치를 바꿀 뿐이다.

나무는 모습이 변할 뿐이다.

우리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은 언제나 변화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변화를 하나의 이름으로 부른다.

바로 시간이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변화를 경험하는 의식이 그것을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조금 더 가까운 경험을 떠올려 보자.

즐거운 사람에게 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병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에게 한 시간은 끝없이 길다.

같은 시계.

같은 육십 분.

그런데 경험은 전혀 다르다.

시간이 달라진 것일까.

아니면 시간을 경험하는 의식이 달라진 것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시간을 세상의 바깥에 있는 객관적인 흐름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은 오히려 다른 가능성을 보여 준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변화이며,

그 변화를 시간으로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의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더욱 깊어진다.

시간은 정말 우주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의식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근본적인 형식일까.

이 질문은 단순히 철학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 과학이 물질을 설명하는 방식까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 하나와 만나게 된다.

과학은 물질을 연구한다고 말하지만,

물질을 설명하는 거의 모든 공식 속에는

언제나 시간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왜 물질을 설명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반드시 함께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그 질문이 바로 다음 절의 출발점이 된다.

2.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가, 변화를 측정하는가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가, 변화를 측정하는가

우리는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시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누구나 시계가 시간을 재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잠시 시계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날로그 시계는 바늘이 회전한다.

전자시계는 숫자가 바뀐다.

원자시계는 원자의 진동을 이용한다.

모래시계는 모래가 떨어진다.

해시계는 태양의 위치가 변한다.

도대체 이들 가운데 어디에 ‘시간’이 있는가?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변화이다.

바늘이 움직인다.

숫자가 바뀐다.

원자가 진동한다.

모래가 떨어진다.

태양의 그림자가 이동한다.

시계는 시간이라는 어떤 물질을 붙잡아 측정하는 기계가 아니다.

일정한 변화를 기준으로 또 다른 변화를 비교하는 장치일 뿐이다.

예를 들어 원자시계는 세슘 원자의 일정한 진동 횟수를 기준으로 삼는다.

우리는 그 반복되는 변화를 ‘1초’라고 약속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진동 자체가 시간은 아니다.

그것 역시 하나의 변화일 뿐이다.

생각해 보자.

우주에 단 하나의 별만 존재하고,

그 별이 영원히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우리는 시간을 말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며,

비교할 대상조차 없다면,

‘1초가 지났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결국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변화를 질서 있게 이해하기 위해 의식이 사용하는 기준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이 나타난다.

과학의 모든 운동 법칙은

거리와 시간의 관계를 이용한다.

속도도 그렇고,

가속도도 그렇다.

에너지도,

중력도,

우주의 진화도 모두 시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런데 정작 그 시간은

누구도 직접 본 적이 없다.

과학은 물질을 설명한다고 말하지만,

설명에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과연 물질만을 연구하는 학문일까.

아니면 이미 의식이 사용하는 인식의 형식을 전제로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현대 물리학이 마주한 가장 깊은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뉴턴의 절대시간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관찰자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더 나아가 현대 물리학자들은

시간 자체를 다시 정의하려는 시도까지 시작했다.

그렇다면 시간은 정말 우주의 절대적인 흐름일까.

아니면 의식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일까.

이 질문은 이제 현대 과학의 중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3.과학은 왜 물질을 설명하면서 시간을 사용하는가

과학은 흔히 물질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원자를 연구하고,

에너지를 연구하며,

별과 은하를 연구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과학이 오직 물질만을 다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나타난다.

과학은 물질을 설명할 때마다

언제나 시간을 함께 사용한다.

속도를 계산할 때도,

가속도를 계산할 때도,

행성의 운동을 설명할 때도,

우주의 나이를 말할 때도,

시간은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시간은 물질인가?

시간은 원자처럼 존재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시간을 직접 본 적이 없다.

우리가 본 것은 언제나 변화였다.

그럼에도 과학은 그 보이지 않는 시간을 가장 기본적인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질문이 나타난다.

시간만 그럴까?

그렇지 않다.

과학은 수를 사용한다.

길이를 사용한다.

넓이를 사용한다.

부피를 사용한다.

거리와 방향을 사용한다.

그러나 숫자 1은 어디에 있는가?

숫자 10은 우주 어디에 존재하는가?

직선은 자연 속에 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완전한 원은 실제 자연 안에서 발견되는가?

사물은 단지 존재할 뿐이다.

하나,

둘,

셋이라는 구분은 의식이 부여한다.

길이도,

넓이도,

거리도,

크기도,

모두 의식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준이다.

결국 과학은 물질만을 사용하는 학문이 아니다.

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을 사용하고,

공간을 사용하며,

수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물질 자체라기보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인식의 형식들이다.

바로 이 점에서 과학은 놀라운 사실을 보여 준다.

과학은 외부 세계를 연구한다고 말하지만,

그 연구는 처음부터

의식이 제공하는 인식의 틀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이 칸트였다.

그는 시간과 공간은 사물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선험적 형식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은 또 다른 방향에서 같은 문제를 만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절대적인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찰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흐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시간은 더 이상 우주 전체에 동일하게 흐르는 절대적인 배경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과연 시간은 우주가 만들어 낸 것일까.

아니면 의식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근본적인 형식일까.

이 질문은 현대 물리학을 넘어,

인간 존재 자체를 다시 묻게 만든다.

4. 시간은 정말 흐르는가?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한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지나간다.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자.

우리는 과연 시간이 흐르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강물이 흐르는 것은 볼 수 있다.

구름이 움직이는 것도 볼 수 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볼 수 있다.

사람이 늙어 가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간 자체가 흐르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본 것은 언제나 사물의 변화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변화를 ‘시간이 흐른다’고 표현해 왔다.

오랫동안 과학도 그렇게 생각했다.

뉴턴은 시간을 우주 어디에서나 똑같이 흐르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보았다.

사람이 보든,

보지 않든,

우주는 같은 시간 속에서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아인슈타인은 이 생각을 뒤집었다.

그는 시간이 모든 곳에서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고 밝혔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르고,

강한 중력이 있는 곳에서도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즉, 시간은 절대적인 배경이 아니라 관찰자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발견은 현대 과학에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었다.

시간은 더 이상 누구에게나 동일한 절대 기준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시간이 사람마다 다르게 흐를 수 있다면,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은 현대 물리학을 더욱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흐르는 시간’이 필수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우주 자체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의 거대한 시계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는 것일까?

혹시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변화를 순서대로 경험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볼 때를 생각해 보자.

스크린에서는 사람이 걷고,

말하고,

웃고,

울며,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름은 수많은 정지된 장면들의 연속일 뿐이다.

움직임은 화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들을 이어 보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완성된다.

우리의 시간 경험도 이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변화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변화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하는 것은 의식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시간은 물질의 성질이라기보다

의식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시간을 언제나 숫자로 표현한다.

1초.

1분.

1시간.

하루.

1년.

우리는 숫자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숫자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우주가 스스로 ‘1’과 ‘2’를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숫자 역시 의식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언어일까?

이제 우리는 시간 다음으로,

‘수(數)’의 정체를 살펴볼 차례이다.

5. 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리는 숫자를 너무도 당연하게 사용한다.

하나.

둘.

셋.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숫자를 배우고,

평생 숫자와 함께 살아간다.

과학도 숫자로 시작한다.

수학은 숫자를 연구한다.

물리학도 숫자로 우주를 설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숫자가 실제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자.

숫자 ‘1’은 어디에 있는가?

산속에 있는가?

바다에 있는가?

우주 어느 행성에 존재하는가?

사과 하나를 볼 수는 있다.

돌 하나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사과이지,

‘1’이라는 숫자가 아니다.

숫자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숫자를 사용한다.

사물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사과는 자신이 하나라는 사실을 모른다.

돌도 자신이 둘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별도 자신이 수천억 개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나’,

‘둘’,

‘셋’이라는 질서는

사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의식 안에서 성립한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

1미터는 어디에 있는가?

1킬로그램은 어디에 있는가?

90도는 어디에 있는가?

자연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길이를 재는 기준도,

무게를 재는 기준도,

각도를 재는 기준도,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만든 질서이다.

과학은 이 기준을 이용하여

우주의 법칙을 설명한다.

그러나 기준은 물질이 아니다.

시간도 그렇고,

수도 그렇고,

측정의 기준도 그렇다.

이들은 모두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언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과학은 물질을 연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들은

시간,

수,

길이,

무게,

거리처럼

모두 비물질적인 개념들이다.

과학은 물질을 설명하지만,

물질만으로는 과학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은 지금까지

물질을 연구한 것일까?

아니면

의식이 제공한 인식의 언어를 이용하여

물질을 해석해 온 것일까?

이 질문은 우리를 또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로 이끈다.

시간과 수가

의식 안에서 성립하는 형식이라면,

공간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공간을 바깥에서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공간 역시

의식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근본적인 형식 가운데 하나일까.

이제 우리는

공간의 정체를 살펴볼 차례이다.

6. 공간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말한다.

공간이 있다.

이 방에도 공간이 있고,

밖에도 공간이 있으며,

우주에도 끝없이 넓은 공간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정말 공간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보는 것은

벽이다.

책상이다.

나무이다.

하늘이다.

별이다.

그러나 공간 자체를 본 적은 없다.

공간은 색깔이 있는가?

모양이 있는가?

무게가 있는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가?

아무도 공간 자체를 본 적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공간 안에 있는 사물을 볼 뿐이다.

빈 컵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컵 안이 비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비어 있는 것일까?

공기가 들어 있다.

빛이 들어 있다.

열이 존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입자들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빈 공간’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사물과 사물 사이를 공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공간을 본 것이 아니라,

사물의 위치 관계를 이해한 것에 가깝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

눈을 감으면

방은 어디에 있는가?

책상은 어디에 있는가?

하늘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눈을 감아도

방의 구조를 떠올릴 수 있다.

책상의 위치도 기억한다.

집 안의 모습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공간은

밖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의식 안에서 구성되는 것일까?

시간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숫자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공간 자체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공간 없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시간과 공간은

정말 우주 자체의 성질일까?

아니면 인간이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인식의 형식일까?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인류의 사고를 뒤흔드는 하나의 결론을 제시했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의식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틀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칸트가 왜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볼 차례이다.

7. 칸트는 왜 시간과 공간을 선험형식이라 했는가?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인류의 사고를 뒤흔드는 질문 하나를 던졌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의식을 통해 해석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본다고 생각한다.

눈으로 산을 보고,

바다를 보고,

하늘을 본다고 믿는다.

그러나 칸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기 전에 이미 가지고 있는 틀이 있다고 보았다.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우리는 먼저 시간을 배우고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공간을 공부한 뒤 세상을 인식하는 것도 아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의 의식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을 통해 세상을 경험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건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고,

모든 사물을 공간 속에 놓인 존재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은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우리의 의식 안에 있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 생각은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이 우주 자체의 성질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칸트는 그 믿음을 뒤집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안경을 통해 바라본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붉은 안경을 쓰면 세상이 붉게 보인다.

푸른 안경을 쓰면 세상이 푸르게 보인다.

안경을 벗기 전에는

원래 색을 확인할 수 없다.

칸트가 말한 시간과 공간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식의 틀을 벗어나

세상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와

사물 자체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를 현상(Phenomenon),

우리의 경험을 넘어 존재하는 사물 자체를 물자체(Ding an sich)라고 불렀다.

이 구분은 현대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만약 시간과 공간이 의식의 형식이라면,

그 형식을 사용하는 ‘의식’은 도대체 무엇인가?

시간을 구성하는 것도 의식이고,

공간을 경험하는 것도 의식이라면,

정작 그 의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질문은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이 풀어야 할 가장 큰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람이 바로 헤겔이었다.

8. 헤겔은 왜 주관이 객관을 포함한다고 했는가?

칸트는 인간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식의 형식을 통해 세상을 경험한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철학의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칸트의 철학에는 하나의 질문이 남아 있었다.

만약 우리가 의식을 통해서만 세계를 경험한다면,

의식과 세계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일까?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은 이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는 주관과 객관을 서로 분리된 두 존재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둘은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나’와

‘세상’을 따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내가 있고,

그 밖에 세상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헤겔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우리가 세계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바깥의 사물을 복사하는 일이 아니다.

의식은 단순한 거울이 아니다.

의식은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하나의 질서를 만들어 간다.

예를 들어,

같은 나무를 보아도

식물학자는 생명의 구조를 본다.

화가는 아름다움을 본다.

목수는 목재를 본다.

어린아이는 놀이터를 본다.

나무는 하나인데,

경험되는 세계는 서로 다르다.

왜 그럴까?

사물을 바라보는 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헤겔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객관적인 세계는

주관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통하여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의식과 세계가

끊임없이 서로를 드러내고 발전시키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의 변증법적 사고의 핵심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의식도 성장하고,

그 성장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도 함께 발전한다.

결국 주관과 객관은

대립하는 두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진리를 향해 함께 움직이는 두 측면인 것이다.

이 생각은 오늘날에도 많은 의미를 가진다.

현대 뇌과학은

뇌가 외부 세계를 그대로 복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감각 정보를 선택하고,

조합하고,

예측하며,

의미를 만들어 낸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단순히 바깥에 있는 세계가 아니라,

의식이 해석하고 구성한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200년 전에

이미 그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의식의 형식이라고 말했다.

헤겔은 의식과 세계가

하나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현대 과학도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설명은 가능할까?

바로 그 질문이

우리를 대의식장이론으로 이끈다.

9. 대의식장이론은 철학의 빈칸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시간을 살펴보았다.

숫자를 살펴보았다.

공간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칸트와 헤겔의 철학도 함께 살펴보았다.

칸트는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식의 형식을 통하여 나타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문제를 남겨 두었다.

그것이 바로 물자체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현상일 뿐이라면,

그 현상 너머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칸트는 그것을 물자체라고 불렀지만,

인간은 그것을 직접 알 수 없다고 보았다.

헤겔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의식과 세계를 서로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주관과 객관은 하나의 과정이며,

의식은 세계를 받아들이는 존재인 동시에,

세계를 드러내는 존재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의식과 세계가 하나라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대의식장이론은 바로 이 질문에 새로운 설명을 제안한다.

대의식장이론에서 의식은 하나의 평면이 아니다.

의식은 하나의 거대한 장이며,

그 안에는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여러 의식층이 존재한다.

마치 인간의 뇌가 서로 다른 영역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하듯,

의식장 역시 다양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억을 담당하는 의식층이 있고,

상상을 담당하는 의식층이 있으며,

꿈을 경험하는 의식층도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세계 역시,

그 여러 의식층 가운데 하나인 현실 의식층에서 경험되는 세계이다.

여기에서 대의식장이론은 칸트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칸트는 현상세계와 물자체를 구분하였다.

그러나 대의식장이론은

현상세계 밖에 별도의 물자체가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세계는

처음부터 의식장에서 구현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실세계는 물자체와 분리된 현상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현실 자체가

현실 의식층에서 구현되는 세계이다.

우리가 그것을 물질세계라고 부르는 이유는,

현재의 의식이 바로 그 의식층에서 세계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자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현하는 의식층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질은 의식과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현실 의식층 안에서 경험되는 하나의 구현 방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칸트가 발견한 인식의 형식과,

헤겔이 설명한 의식과 세계의 통일은

하나의 더 큰 구조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대의식장이론은

그 둘을 하나의 의식장 안에서 통합한다.

세계는 의식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장 안에서 함께 구현되는 현실이다.

이것은 꿈을 꾸는 경험을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쉽다.

우리는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기도 한다.

꿈속의 나는

그 세계를 현실이라고 믿는다.

그 안에는 나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있으며,

하늘과 땅도 존재한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우리는 안다.

꿈속의 나와,

꿈속의 사람들과,

꿈속의 세계는

모두 하나의 의식 안에서 일어난 경험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영화 속 인물은

또 다른 영화를 현실로 경험한다.

그러나 극장 밖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영화 속 주인공도,

그 주인공이 보고 있는 영화도,

모두 하나의 스크린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뿐이다.

대의식장이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다고 본다.

우리는 지금

나와 세계,

주관과 객관,

인간과 자연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더 큰 의식장의 관점에서 보면,

주관과 객관은 서로 다른 두 실체가 아니다.

둘 다 하나의 의식장 안에서 함께 구현되는 현실이다.

우리가 의식 안에서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하나의 더 큰 의식 안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경험하는 물질세계 역시

의식장 안의 한 현실층에서 구현되는 세계이며,

그 밖의 의식층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경험과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의식장은

어떻게 현실을 구현하는 것일까?

대의식장이론은

그 원리를 물질이 아니라 로고스에서 찾는다.

성경은 태초에 물질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여기서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질서와 의미,

그리고 개념을 뜻하는 로고스이다.

원의식자는

흙이나 원자를 먼저 만든 것이 아니라,

로고스라는 개념과 질서를 통하여

현실 의식층을 구현하였다.

오늘날 컴퓨터는

0과 1이라는 보이지 않는 정보만으로

영상과 음악,

그리고 하나의 가상세계를 구현한다.

인공지능도

데이터와 알고리즘이라는 비물질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화면에서 보는 세계는

반도체 안에 실제로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정보가 질서 있게 구현되면서

현실처럼 경험되는 것이다.

대의식장이론은

우주의 창조 역시 이와 유사한 원리로 이해한다.

물질이 먼저가 아니라,

로고스가 먼저이다.

개념이 먼저이고,

질서가 먼저이며,

그 질서가 현실 의식층에서 구현될 때

우리가 경험하는 우주와 인간의 세계가 나타난다.

이것이 대의식장이론이 제안하는

철학과 과학,

그리고 종교를 하나로 연결하는 새로운 세계 해석이다.

10. 우리는 어떤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의 질문을 따라 긴 여행을 해 왔다.

시간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숫자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공간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리고 의식은 무엇인가.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다시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시간도,

숫자도,

공간도,

모두 물질처럼 만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방식이었다.

칸트는 이것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형식으로 설명하였다.

헤겔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관과 객관이 하나의 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대의식장이론은

이 둘을 하나의 의식장 안에서 다시 통합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의식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독립된 세계가 아니다.

현실은 하나의 의식장에서 구현되는 경험의 세계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가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고통을 느끼며,

세계를 현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더 큰 관점에서 보면,

주관과 객관,

인간과 자연,

관찰자와 대상은

모두 하나의 의식장 안에서 함께 나타나는 현실이다.

마치 꿈속에서는

꿈속의 사람과 산과 하늘이 모두 현실처럼 존재하지만,

깨어난 뒤에는 그것이 하나의 의식 안에서 이루어진 경험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영화도 그렇다.

영화 속 인물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현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스크린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주인공도,

배경도,

이야기도,

모두 하나의 화면 안에서 구현되고 있음을 안다.

대의식장이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역시 이러한 구조를 가진다고 본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나와 세계를 구분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더 큰 의식장의 관점에서는,

나도,

세계도,

시간도,

공간도,

모두 하나의 의식장 안에서 함께 구현되는 현실이다.

이것이 대의식장이론이 말하는 세계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를 밖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의식 안에서 구현된 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일까?

만약 후자라면,

우주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더 이상 물질만이 아닐 것이다.

의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주의 절반만 이해한 것과 다르지 않다.

철학은 존재를 물었다.

과학은 세계를 분석하였다.

종교는 창조의 근원을 찾고자 하였다.

세 길은 서로 다른 방향을 걷는 것처럼 보였지만,

대의식장이론은

그 세 길이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 중심에는

의식이 있다.

그리고 그 의식은

단순히 인간의 뇌에서 우연히 생겨난 부산물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를 경험하며,

세계를 구현하는 가장 근본적인 장일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단순히 우주 속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의식장 안에서

세계를 경험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질문이

다음 장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까?

의식도 성장하고 변화하며 진화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그 질문을 향해 다시 한 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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