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식과 성경〉은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 묻는 연재다. 성경을 믿느냐는 질문보다 먼저, 우리는 과연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를 묻고자 한다.
의식과 성경, 왜 창세기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가
- 우리는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많은 지식을 가진 시대가 있었을까.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을 거의 동시에 볼 수 있고, 수십억 광년 떨어진 우주를 관측하며, 인간의 유전자를 분석하고, 뇌의 활동까지 영상으로 들여다본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있다.
그토록 많은 것을 알게 된 인간이 아직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왜 태어났으며 어디로 가는가.
생명은 무엇인가.
죽음은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이해하며 ‘나’라고 느끼는 의식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세상에 관한 엄청난 정보를 축적했지만, 정작 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질문은 아직 끝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심을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과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과연 같은 말일까?
- 식자우환, 모르는 것보다 위험한 것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있다.
배우고 아는 것이 오히려 근심과 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고자 한다.
모르는 사람은 질문할 수 있다.
“나는 모른다”고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알아볼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조금 알고 있으면서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질문이 멈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진실 그 자체라고 믿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것이 더 깊은 의미의 식자우환인지도 모른다.
지식이 많아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아는 것의 한계를 알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 말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과학이나 철학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종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특히 수천 년 동안 읽혀온 한 권의 책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바로 성경이다.
- 성경을 믿는 것과 성경을 아는 것은 같은가
기독교인에게 “성경을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하고 싶다.
성경을 알고 있는가?
믿는 것과 아는 것은 같은 것인가?
성경 구절을 많이 암송한다는 것이 성경 전체를 이해한다는 뜻인가?
어떤 교단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여기서부터 불편한 질문이 시작된다.
성경은 하나인데 왜 그 성경을 근거로 수많은 교단과 해석이 갈라졌는가.
같은 하나님을 말하면서 왜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가.
같은 성경에서 서로 반대되는 결론이 나온다면 적어도 한 번은 물어야 한다.
문제는 성경에 있는가, 아니면 성경을 읽어온 인간의 해석에 있는가?

-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영자신문을 읽는다면
한 사람이 영어신문을 펼쳤다고 생각해보자.
알파벳은 읽는다.
몇몇 단어도 안다.
God, life, death, love.
그런데 문법을 모르고 문맥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사람이 자기가 아는 단어 몇 개를 이어 붙여 신문 전체의 뜻을 설명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정확한 독해라고 할 수 있을까?
성경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한다.
‘성령’을 안다고 생각한다.
‘구원’, ‘천국’, ‘죄’, ‘부활’, ‘영생’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뜻이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사용된 의미와 정말 같은가?
단어를 안다고 문장을 아는 것은 아니다.
문장을 안다고 한 권의 책 전체를 아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그 책이 상징과 비유와 예언을 사용한다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 성경이 사랑을 말한다면 왜 세상은 갈라졌는가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현실에 한번 비추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사랑을 말한다.
용서를 말한다.
화해를 말한다.
평화를 말한다.
생명을 말한다.
그런데 종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 이름 아래 갈등과 배척과 폭력이 벌어진 순간들도 있었다.
오늘날의 전쟁 역시 종교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민족, 영토, 국가, 권력, 안보와 역사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와 별개의 질문이 남는다.
사랑을 가르치는 경전을 가진 사람이 증오한다면 그 가르침은 어디로 갔는가?
용서를 가르치는 종교가 원수가 되어 싸운다면 우리는 그 경전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가?
이 질문은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묻는 질문이다.
성경의 목적이 인간을 생명과 사랑과 평화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그 말씀을 믿는 사람과 공동체의 삶에서도 그 방향이 나타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시 성경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 성경은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읽으라고 했는가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등장한다.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경에는 역사적 서술도 있고, 시와 지혜문학도 있으며, 비유와 상징과 예언도 있다.
시편 78편 2절에는 비유를 말하고 오래된 감추어진 일을 드러낸다는 표현이 나온다. 마태복음 13장 34~35절은 이 구절을 예수의 비유 사용과 연결한다.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표현을 언제나 눈에 보이는 물리적 사물로만 이해하는 것이 옳을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비유를 사실로 읽으면 뜻이 달라지고, 상징을 물질로 읽으면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밀은 그것이 비밀이라는 사실 때문에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의미를 풀지 못하면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읽는 작업에는 먼저 하나의 원칙이 필요하다.
문자만 읽지 말고 문맥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성경의 상징은 성경 안에서 그 사용례를 찾아보아야 한다.

- 첫째 날의 빛은 무엇인가
그 문제는 놀랍게도 창세기 첫 장부터 나타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먼저 빛이 있으라고 한다.
그런데 해와 달에 해당하는 두 큰 광명체와 별들은 넷째 날에 등장한다.
여기에서 질문이 생긴다.
첫째 날의 빛은 무엇인가?
넷째 날의 광명체와 첫째 날의 빛은 같은 차원의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창세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천문학적 창조 순서와는 다른 차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
당장 답을 결정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다.
창세기를 오직 현대 자연과학 교과서처럼 읽는다면 이런 문제들을 설명해야 한다.
반대로 창세기의 언어에 상징적·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다면 그 상징을 성경 안에서 추적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하려는 작업이다.
- 해와 달과 별은 언제나 천체인가
성경은 스스로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창세기 37장의 요셉의 꿈에서는 해와 달과 별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천문 관측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과 인간관계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예언서와 묵시문학에서 등장하는 해와 달과 별 역시 본문의 장르와 문맥을 검토하지 않은 채 언제나 물리적 천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이후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해진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이 떨어지고,
하늘이 흔들린다는 표현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것은 천문현상을 말하는가, 아니면 성경이 다른 곳에서 사용한 상징의 언어인가?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 성경과 과학이 충돌하는가, 해석과 과학이 충돌하는가
창세기를 둘러싼 대표적인 논쟁 가운데 하나가 인류와 우주의 연대 문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성경 본문 자체와 특정 시대에 형성된 성경 해석은 같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과학적 발견과 어떤 성경 해석이 충돌한다고 해서 즉시 “과학과 성경이 충돌한다”고 결론내릴 필요는 없다.
먼저 물어야 한다.
혹시 과학과 충돌한 것은 성경이 아니라 인간이 성경에 입혀놓은 해석이 아니었는가?
이 질문은 과학을 부정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성경을 과학책으로 만들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둘을 정직하게 분리하기 위한 질문이다.
과학은 자연현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연구한다.
성경이 인간의 근원과 생명, 죽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한다면 우리는 그 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부터 밝혀야 한다.
그 일을 하지 않고 둘을 싸움 붙이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 아담은 정말 인류 최초의 인간인가
그러면 더 큰 질문이 등장한다.
창세기의 아담을 반드시 생물학적으로 지구에 처음 존재한 인간이라고 읽어야 하는가?
이 질문 하나만 바뀌어도 성경과 인류 역사를 바라보는 구도가 크게 달라진다.
만일 아담 이야기가 인류 전체의 생물학적 시작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인간 가운데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존재와 그 계보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여기서 정답으로 선언하지 않겠다.
앞으로 성경의 계보, 하나님의 형상, 생기, 생령, 아담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하나씩 대조하며 검토해야 할 중요한 가설이다.
〈의식과 성경〉은 바로 이런 질문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 생명과 사망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줄기
성경을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펼쳐놓으면 반복해서 등장하는 두 단어가 있다.
생명과 사망이다.
창세기에는 생명나무가 등장한다.
인간의 범죄 이후에는 죽음의 문제가 등장한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생명의 문제가 다시 나타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아담 안에서 죽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는 것을 대조한다.
그리고 성경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마침내 사망과 애통과 고통이 사라지는 세계가 제시된다.
그렇다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 전체가 생명에서 시작해 사망의 문제를 지나 다시 생명으로 돌아가는 구조라면, 구원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과 구원이 완성됐다는 것
여기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자.
세상에 아직 치료법이 없는 암이 있다고 하자.
어느 날 한 의사가 오랜 연구 끝에 그 암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 순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제 이 병을 치료할 길이 열렸다.”
그러나 그것이 곧 세상의 모든 암 환자가 이미 치료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치료법이 마련된 것과 환자가 실제 치료를 받아 건강을 회복한 것은 다른 단계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과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은 같은 의미인가?
만일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되었다면 성경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약속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왜 요한계시록은 마지막에 가서야 사망이 없어지는 세계를 말하는가?
이것 역시 앞으로 본문을 통해 검토해야 할 문제다.

- 성령과 육체, 빛과 어둠
그리고 여기에서 〈의식과 성경〉이라는 제목의 핵심으로 들어간다.
성경에는 빛과 어둠이라는 대조가 반복된다.
성령과 육체의 대조도 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은 육체의 욕망과 성령의 뜻이 서로 대립하는 구조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는 빛과 어둠의 이미지가 사람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는 언어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빛과 어둠은 단순히 낮과 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닫는가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식이라는 문제를 다시 만나게 된다.
같은 성경을 읽고도 왜 전혀 다른 것을 보는가?
같은 하나님을 말하면서 왜 서로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가?
문제가 단순히 정보량의 차이가 아니라 그 정보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의식 상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성령, 진리, 육체, 거짓, 빛과 어둠을 다시 살펴보려는 이유다.

- 성경을 발가벗긴다는 것
그래서 이 작업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발가벗은 성경’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을 발가벗긴다는 것은 성경을 조롱하거나 훼손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위에 인간이 입혀놓은 옷을 하나씩 벗겨보자는 뜻이다.
교단의 옷.
전통의 옷.
권력의 옷.
욕망의 옷.
그리고 너무 오래 들어 익숙해져 버린 해석의 옷.
그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성경 자체의 문장 앞에 서보자는 것이다.
그때 우리가 알고 있던 하나님은 그대로 나타날까?
우리가 알고 있던 구원은 그대로일까?
성령과 천국과 영생과 죽음의 의미 역시 그대로일까?
아니면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성경의 얼굴이 드러날까?
- 첫 단추를 다시 끼우다
우리는 성경의 마지막부터 고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창세기부터 돌아갈 것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면 마지막 단추를 아무리 당겨도 옷은 바로 입혀지지 않는다.
빛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생기는 무엇인가.
생령은 무엇인가.
아담은 누구인가.
생명나무는 무엇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무엇인가.
뱀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에게 죽음은 왜 찾아왔는가.
이 질문들을 하나씩 다시 열어볼 것이다.
어느 교단을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새로운 교리를 하나 더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답을 잠시 옆에 내려놓고 성경 자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처음부터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이 연재의 출발점은 믿음과 불신의 싸움이 아니다.
질문이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더 근원적으로,
우리는 성경을 읽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배워온 해석을 성경이라고 믿으며 읽고 있는가?
〈의식과 성경〉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성경이 틀렸다고 결론내리기 전에,
성경이 옳다고 선언하기 전에,
먼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다시 읽어보자.
그 첫 번째 문은 창세기에서 열린다.
그리고 그 문 앞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존재는 인간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였다.”
그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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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몸인가, 영인가, 생명인가, 의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