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인가, 원의식에서 온 것인가

종교는 인간이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만든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잊어버린 근원과 다시 연결되기 위해 주어진 길일까?
오늘날 종교는 인간이 만든 문화와 제도의 하나로 설명되기도 한다. 자연재해와 질병, 죽음의 원인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신을 상상했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규범과 의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종교는 인간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형성되었다. 역사 속에서는 종교가 권력과 결합하여 사람을 지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다”는 설명만으로 종교의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종교를 만든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태어나고 늙고 죽는 육체만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그 몸을 통해 보고, 느끼고, 생각하며 삶의 의미를 묻는 의식이 인간의 본질인가?
우리의 육체는 세대마다 바뀐다. 그러나 생명의 계보는 부모와 조상을 거쳐 지금의 나에게 이어졌다. 언어와 기억, 가치와 신앙도 다음 세대로 전달되었다.
이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인간과 최초의 의식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도달한다.
천봉의식장이론은 생명과 인식, 경험과 창조가 시작될 수 있었던 근원적 토대를 ‘원의식’이라고 부른다.
이 관점에서 종교는 인간이 외부에 낯선 신을 만들어 믿는 행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가의식에 갇힌 인간이 자신의 근원을 발견하고 참의식을 회복하여 원의식과 다시 연결되는 길이 된다.
이 장에서는 특정 종교 하나의 교리를 확정하려 하지 않는다. 먼저 종교의 공통된 구조를 살펴보고, 의식과 마음, 정신과 영혼의 관계를 정리한다.
그 위에서 종교의 기원과 계시, 신과 인간의 의식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천봉의 관점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1. 종교라는 말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종교를 교회나 사찰 같은 건물로 생각하기도 하고, 예배와 기도, 명상과 수행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 종교는 위로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계율이며, 또 다른 사람에게는 진리를 찾는 길이다.
그렇다면 종교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종교는 근본을 묻는 가르침이다
한자어 ‘종교’는 근본과 으뜸을 뜻하는 ‘종’과 가르침을 뜻하는 ‘교’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의 삶과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교는 생활에 필요한 기술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왜 고통과 죽음이 존재하는가?
선과 악은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도 의식은 존재하는가?
인간은 자신의 근원과 다시 만날 수 있는가?
철학도 이러한 질문을 다룬다. 그러나 종교는 사유에 머물지 않고 신앙과 수행, 깨달음과 구원이라는 삶의 길을 함께 제시한다.
종교는 무엇을 변화시키려 하는가
종교는 무엇을 믿는지만을 묻지 않는다. 그 믿음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도 묻는다.
기독교는 사랑과 거듭남, 진리와 구원을 이야기한다. 불교는 무명과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다. 유교는 인간의 도리와 인격의 완성을 강조한다.
각 전통의 교리와 수행법은 다르다. 그러나 인간이 현재의 욕망과 무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은 공통으로 발견된다.
따라서 종교의 목적은 외형적인 소속만 바꾸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의 의식과 삶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물질문명은 종교의 질문을 해결했는가
과학은 질병을 치료하고 우주를 관찰하며 인간의 생활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물질문명이 발전했다고 해서 인간의 내면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과학은 뇌의 활동을 측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왜 미워하고 사랑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최종 답을 자동으로 제공하지는 않는다.
종교가 계속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가 물질적 조건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근본의 가르침은 인간을 어디로 이끌려는 것일까?
그 답은 종교를 ‘재연결’로 보는 관점에서 시작된다.
2. Religion은 정말 다시 연결한다는 뜻인가
영어 religion의 어원에는 여러 견해가 있다.
자세히 살피고 되새긴다는 뜻의 라틴어와 연결하는 견해도 있고, 다시 묶거나 연결한다는 뜻의 religare와 연결하는 전통도 있다.
어느 하나만을 유일한 어원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다시 연결한다’는 해석은 종교의 목적을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철학적 실마리다.
다시 연결하려면 단절이 있어야 한다
‘다시 연결한다’는 말에는 처음에는 연결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관계가 끊어졌다는 전제가 포함된다.
처음부터 아무 관계도 없었다면 재연결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죄와 타락의 문제로 설명하며, 구원을 그 관계의 회복으로 이해한다.
불교는 같은 방식의 창조주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무명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현실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진단한다.
교리는 다르지만 현재의 인간이 완전한 상태에 있지 않으며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서로 비교할 수 있다.
무엇과 무엇이 다시 연결되는가
재연결의 대상은 종교에 따라 신과 인간, 진리와 인간, 본래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으로 표현될 수 있다.
천봉의식장이론에서는 이를 원의식과 개별의식의 관계로 설명한다.
원의식은 모든 개인의 생각을 대신하는 하나의 거대한 개인이 아니다. 생명과 의식이 나타날 수 있었던 근원적 토대를 뜻한다.
개별의식은 그 근원에서 생명을 이어받아 각자의 몸과 경험을 통해 세계를 살아가는 의식이다.
인간이 근원의 질서를 잊고 자신의 욕망만을 중심으로 살아갈 때 의식의 단절이 깊어진다. 종교의 목적은 그 단절을 발견하고 근원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다.
형식이 목적을 대신할 수 있는가
기도와 예배, 명상과 수행은 종교의 중요한 형식이다. 그러나 형식 자체가 종교의 최종 목적은 아니다.
경전을 많이 읽어도 의식이 변하지 않을 수 있다. 오랫동안 종교생활을 해도 욕심과 거짓, 미움과 교만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
형식은 목적지로 가는 길이지 목적지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다시 연결되어야 할 인간의 내면은 무엇인가?
이를 알려면 의식과 마음, 정신과 영, 영혼이라는 말부터 구별할 필요가 있다.
3. 의식·마음·정신·영·영혼은 같은 것인가
이 용어들은 서로 비슷하게 사용되지만 언제나 같은 뜻은 아니다. 시대와 문화, 종교와 학문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모든 말을 하나로 합치거나 완전히 별개의 실체로 나누기보다, 각각이 인간의 내면을 어떤 관점에서 설명하는지 살펴보는 편이 좋다.
의식과 마음은 어떻게 다른가
의식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며 자신과 세계를 경험하는 능력이다.
눈은 빛을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무엇을 보는지 알지 못한다. 귀는 진동을 받지만 음악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의식은 감각기관과 뇌를 통해 들어온 정보를 하나의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마음은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 욕망과 의지의 움직임을 가리킬 때가 많다.
의식을 경험을 비추는 빛이라고 한다면, 마음은 그 빛 안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내면의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정신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정신은 이성적 사고와 판단, 인격과 가치관을 강조할 때 사용된다.
정신이 맑다고 말할 때는 단순히 깨어 있다는 뜻만이 아니다. 판단과 삶의 방향이 분명하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따라서 정신은 의식의 작용 가운데 사고와 의지, 가치의 방향이 드러나는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과 영혼은 어떤 질문을 담고 있는가
영과 영혼은 인간의 생명과 정체성이 육체를 넘어서는지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되는 종교적 언어다.
기독교에서 영은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차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불교는 고정된 영혼을 같은 방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식의 연속성과 업, 생사와 해탈의 문제를 다룬다.
이 개념들을 억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다만 모두 인간이 단순한 육체 이상의 존재인지를 묻는다는 점에서는 만난다.
천봉은 의식을 가장 넓은 바탕으로 보고, 마음을 그 안의 움직임으로, 정신을 가치와 판단의 방향으로 이해한다. 영과 영혼은 의식이 생명의 근원 및 육체를 넘어선 존재 문제와 관계될 때 사용하는 언어로 본다.
이 내면의 주체가 세대를 건너 문명과 종교를 만들었다면, 인간의 역사는 물질의 역사인 동시에 의식의 역사다.

4. 인간의 역사는 왜 의식의 역사인가
우리는 역사를 국가와 전쟁, 제도와 문명의 변화로 배운다. 그러나 그 모든 역사를 만든 주체는 인간의 의식이었다.
도구와 법률, 철학과 종교, 과학과 예술은 스스로 생겨난 의미가 아니다. 인간의 의식이 자연을 보고 해석하며 목적을 부여한 결과다.
몸은 사라져도 생명의 계보는 이어진다
수많은 사람이 태어났다가 죽었다.
조상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오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생명의 계보가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뜻이다. 내가 자녀에게 생명을 전한다면 그 계보는 다시 미래로 이어진다.
의식의 내용도 언어와 교육, 기억과 문화를 통해 전해진다.
이것을 생물학적 유전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의식의 역사가 세대를 건너 계승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역사는 누가 역사라고 부르는가
지층과 화석은 인간이 없어도 자연에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과거의 흔적으로 읽고 시간의 순서로 배열하며 하나의 역사로 만드는 존재는 의식이다.
돌은 자신을 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물질은 자신이 문명을 만들었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란 결국 의식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해석하며 어떤 세계를 만들어 왔는가에 관한 역사다.
의식의 계보는 원의식을 증명하는가
부모와 조상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서 원의식이 과학적으로 자동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천봉은 생명의 연속성과 의식의 출현을 바탕으로 그 근원을 묻는 철학적 가설을 제시한다.
최초의 인간에게 의식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물질의 변화만으로 경험과 의미를 아는 주체가 어떻게 생겨났는가?
천봉은 이 질문의 가장 깊은 자리에 원의식이라는 개념을 둔다.
그러나 이어져 온 모든 의식이 언제나 진실한 것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참의식과 가의식의 구별이 필요해진다.
5. 참의식과 가의식은 어떻게 다른가
사람은 같은 사건을 보고도 다르게 해석한다. 욕망과 두려움, 과거의 경험과 선입견이 판단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천봉은 원의식의 생명과 진리의 방향을 바르게 반영하는 의식을 참의식이라고 부르고, 욕망과 거짓, 왜곡된 지식에 지배되는 의식을 가의식이라고 부른다.
참의식은 무엇인가
참의식은 한 개인이 모든 지식을 알고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진실을 향해 열려 있으며, 욕망보다 생명과 양심, 사랑과 진리를 우선하는 의식이다.
참의식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힘이 아니다.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함께 존중하며 근원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려는 방향이다.
가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가의식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완전히 악하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언어와 지식, 가치관을 배우고 자신의 세계관을 만든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정보와 편견, 상처와 욕망도 받아들인다.
자신의 제한된 생각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다른 사람을 정죄할 때 가의식은 더욱 강해진다.
종교의 이름을 사용해도 욕망과 지배를 확대한다면 참의식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
참의식은 어떻게 분별되는가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으므로 삶의 결과를 살펴야 한다.
그 의식은 생명을 살리는가?
거짓보다 진실을 선택하는가?
욕망을 확대하는가, 절제하게 하는가?
타인을 지배하는가, 함께 살아가게 하는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가?
천봉에서 참의식은 주장만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 의식이 만들어 내는 삶과 관계, 행동의 열매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그렇다면 가의식에 빠진 인간은 어떻게 참의식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이 질문에서 종교의 기원을 다시 보게 된다.
6. 종교는 왜 생겨났는가—인간의 필요와 원의식의 요청
종교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설명과 근원에서 계시되었다는 설명은 반드시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두 주장이 아닐 수 있다.
종교의 외적 형성과 내적 근원을 구분하면 두 설명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종교의 외적 기원은 인간의 필요에 있다
인간은 질병과 재해,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을 설명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신화와 의례, 규범과 제도를 만들었다.
경전을 기록하고 예배 공간을 세우며 종교 공동체를 조직한 것도 인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는 역사와 문화 속에서 인간이 형성한 제도다.
종교의 내적 기원은 근원을 찾는 의식에 있다
그러나 인간이 종교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만으로, 왜 인간이 생존을 넘어 영원과 진리, 구원과 깨달음을 물었는지는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은 왜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지 묻는가?
왜 눈앞의 이익을 넘어 선과 악, 사랑과 희생의 의미를 찾는가?
천봉은 이러한 질문 자체가 인간 의식 안에 근원을 찾으려는 방향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본다.
외적인 종교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근원을 향한 내적 요청까지 모두 임의적인 창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와 원의식의 뜻은 함께 존재할 수 있는가
계시나 깨달음이 근원에서 왔다고 해도 그것을 듣고 기록하며 전하는 존재는 인간이다.
따라서 종교에는 근원적 메시지와 인간의 언어, 문화적 해석이 함께 섞일 수 있다.
천봉은 종교의 외형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으며, 그 내면에는 원의식이 인간을 통해 자신의 뜻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것은 확정된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앞으로 분별해야 할 종교철학적 주장이다.
그러나 근원에서 온 말씀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인간의 생각과 구별할 수 있을까?
그 분별 기준이 계시의 구조다.

7. 계시는 언제 열리는가—예언·성취·증험의 원리
종교가 원의식에서 온 가르침을 포함한다고 주장하려면, 그것을 인간이 만든 생각과 구별할 기준이 필요하다.
천봉은 계시가 예언, 봉함, 성취, 증험, 공개의 과정을 통해 분별된다고 본다.
예언과 성취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예언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미리 알리는 약속이다.
봉함은 그 뜻이 성취될 때까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성취는 약속된 내용이 현실의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증험은 예언과 사건의 일치 여부를 증거와 경험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요한복음 14장 29절은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미리 말하는 이유를 그 일이 이루어질 때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신명기 18장 21절과 22절도 예언된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지를 분별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누군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참된 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예언되었는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예언과 사건의 관계를 확인할 증거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거쳐야 한다.
봉함된 말씀은 어떻게 열리는가
봉함은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문장을 읽으면서도 그것이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지 알지 못할 수 있다.
성경은 비유와 봉함, 후대에 밝혀질 비밀을 말한다. 예언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그 사건의 의미가 설명될 때 문자와 실상이 연결된다는 것이 성경적 계시의 중요한 구조다.
불교의 깨달음과 정법은 성경의 예언 성취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인식을 넘어 감추어졌던 진리가 열린다는 다른 종교적 구조로 비교할 수 있다.
각 전통의 차이를 지우지 않으면서 진리가 인간에게 어떻게 알려지는지를 살펴야 한다.
계시는 무엇으로 검증되는가
계시라고 주장되는 말은 본래 경전의 내용과 문맥을 임의로 바꾸지 않아야 한다.
예언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요한계시록 22장의 경고도 자의적인 변경을 경계하는 기준으로 읽을 수 있다.
천봉은 예언을 설계도에 비유한다.
설계도를 임의로 변경하면 실제 건물이 완성되어도 본래 계획과 비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해석자의 욕망에 따라 예언을 바꾸면 성취가 나타나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
참된 계시는 해석자의 권위만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본문과 사건, 증거와 증언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또한 그 계시가 만들어 낸 삶이 진리와 생명의 열매를 보이는지도 살펴야 한다.
계시가 원의식의 뜻을 드러내는 통로라면, 인간 안의 의식과 종교가 말하는 신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8. 신을 부정하면서 의식을 설명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은 신과 창조주를 믿지 않으면서도 인간에게 의식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과학자도 관찰하고 측정하며 해석할 때 자신의 의식을 사용한다.
과학이 발견한 법칙도 인간의 의식 안에서 인식되고 언어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의식은 어디에서 왔으며, 종교가 말하는 신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관찰하는 과학자는 의식 밖에 서 있는가
과학자는 연구하는 세계의 완전한 바깥에 설 수 없다.
망원경이 우주를 관찰해도 빛과 수치를 해석하는 존재는 인간이다. 현미경이 세포를 확대해도 그것을 분류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는 의식이다.
물질주의는 의식을 뇌의 복잡한 신경 활동에서 출현한 현상으로 설명한다.
이는 가능한 과학적 설명이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의식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자체도 논리적 모순은 아니다.
그러나 신경 활동이 어떻게 빨강의 느낌과 고통, 사랑과 의미라는 주관적 경험이 되는지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의식은 신을 자동으로 증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질만으로 인간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인간의 의식에는 신적 성품이 담겨 있는가
창세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17장은 인간을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표현한다.
요한복음 10장 34절과 35절에는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들’이라고 부르는 인용이 나온다.
이 구절들이 모든 인간이 곧 완전한 창조주라는 뜻은 아니다. 전통적인 신학적 해석과 천봉의 해석도 구별해야 한다.
천봉은 이러한 본문을 인간 의식 안에 원의식에서 비롯된 성품과 가능성이 반영되어 있다는 관점으로 읽는다.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이 절대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가의식에서 벗어나 진리와 생명의 방향을 회복하는 사건이다.
창조주를 부정하면 무엇을 설명해야 하는가
창조주를 믿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부모와 조상, 의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단정하면 논증이 지나치게 단순해진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생명의 계보를 통해 근원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물질주의는 최초의 생명과 의식이 자연의 물질적 과정에서 나타났다고 본다. 종교는 그 근원에 창조적 정신이나 신적 원리가 있다고 본다.
천봉은 그 사이에서 질문한다.
물질이 먼저 존재하여 의식을 만들었는가?
아니면 의식이 가능하도록 하는 근원적 토대가 먼저 있었는가?
창조주를 부정하려면 무의식적인 물질에서 주관적 경험과 자아, 의미와 진리 판단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반대로 신을 믿는 사람도 경전을 인용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믿음이 의식의 변화와 삶의 열매로 어떻게 증명되는지를 보여야 한다.
의식은 신을 단번에 증명하는 공식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물질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존재인지, 생명과 진리의 근원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하는 가장 가까운 증거다.
우주는 멀리 있지만 의식은 지금 여기에 있다.
신을 찾으려는 인간이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곳은 먼 하늘만이 아니라, 그 하늘을 바라보며 근원의 의미를 묻는 자신의 의식일지도 모른다.
의식과 원의식의 관계는 앞선 글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제6부 제6장ㅣ도대체 ‘의식장’이란 무엇인가?ㅣ시간·공간·물질과 우주를 다시 보다
9. 종교는 인간의 현재 상태를 어떻게 진단하는가
종교가 인간에게 변화와 구원을 요구한다는 것은 현재의 인간이 완전한 상태에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생긴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죄와 타락의 문제로 설명한다. 불교는 무명과 집착 때문에 인간이 현실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고 생로병사의 고통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두 종교 모두 인간이 자신의 근원과 진리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고 진단한다.
인간의 문제는 외부 환경에만 있는가
사람은 더 좋은 환경과 더 많은 물질을 가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질이 풍족해져도 욕심과 불안, 미움과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전쟁과 폭력, 거짓과 차별은 계속된다.
문명의 도구는 발전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의식이 함께 성숙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같은 과학기술도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할 수 있고 파괴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같은 종교의 가르침도 사랑과 봉사의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반대로 분쟁과 지배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문제는 도구 자체에만 있지 않다. 그 도구를 사용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의 방향에 있다.
천봉의식장이론이 인간의 근본 문제를 의식의 문제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의식은 왜 자신을 참의식이라고 믿는가
가의식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생각을 진리라고 확신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경우다.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 종교, 정치적 집단의 가치관을 받아들인다. 그것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듣다 보면 하나의 해석을 절대적인 사실로 믿게 된다.
가의식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자신의 믿음과 다른 증거가 나타나도 그것을 거부하거나 왜곡한다.
종교 안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경전의 가르침보다 교단의 이익을 앞세우고, 진리를 찾기보다 기존의 권위를 지키려 한다면 종교적 형식 안에서도 가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단절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진 상태를 죄라고 설명한다. 구원은 단순히 벌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사건이다.
불교는 인간이 무명과 갈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고통이 계속된다고 본다. 깨달음은 무지를 벗어나 존재와 현실의 참모습을 보는 변화다.
두 전통을 완전히 같은 교리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지금의 제한된 의식을 그대로 유지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만난다.
천봉은 이러한 상태를 원의식의 생명과 진리에서 멀어진 가의식의 상태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종교는 가의식을 비판하는 데서 끝나는가?
아니다. 종교의 목적은 잘못을 지적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참의식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데 있다.

10. 종교는 어떻게 가의식에서 참의식으로 이끄는가
종교의 목적이 원의식과의 재연결이라면, 그 과정에는 인간 의식의 실제 변화가 있어야 한다.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있거나 경전을 많이 읽는 것만으로 의식이 자동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진리를 듣고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며, 잘못된 생각과 삶의 방향을 고치고, 배운 진리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종교는 가의식에 머물러 있는 인간이 참의식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길이어야 한다.
회개와 수행은 무엇을 변화시키는가
기독교에서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감정에만 머물지 않는다. 생각과 삶의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과 진리를 향해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거듭남도 외적인 신분만 바뀌는 일이 아니다. 옛사람의 사고와 행동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불교의 수행도 지식만을 쌓는 과정이 아니다. 자신의 욕망과 집착, 분노와 어리석음을 관찰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명상과 계율, 지혜의 수행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보고 무명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회개와 수행의 교리적 의미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현재 의식을 그대로 정당화하지 않고 변화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비교할 수 있다.
진리는 왜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는가
진리는 머릿속에 저장하는 정보만이 아니다.
사랑을 배웠지만 계속 미워한다면 그 사람은 사랑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정직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한다면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참된 앎은 의식과 행동을 바꾼다.
천봉의 관점에서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글자와 문장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원의식의 생명과 질서가 인간의 의식 안에 들어와 삶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의 성령과 거듭남, 불교가 말하는 깨달음과 정법을 하나의 교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리가 인간의 의식에 받아들여질 때 이전과 다른 존재 방식이 시작된다는 점에서는 서로 비교할 수 있다.
참의식은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참의식은 신비한 체험이나 특별한 명칭만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타인을 무시하고 지배한다면, 그 깨달음은 다시 검토해야 한다.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거짓과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주장도 삶의 열매를 통해 분별해야 한다.
참의식은 생명을 살리고, 거짓보다 진실을 선택하며, 욕망보다 양심을 따른다. 자신만을 높이지 않고 다른 생명과 함께 살아갈 길을 찾는다.
종교의 목적은 사람을 현실에서 도피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변화된 의식으로 현실을 새롭게 살아가게 하는 데 있다.
개인의 의식이 달라지면 관계가 달라진다. 관계가 달라지면 공동체가 달라진다. 공동체의 의식이 달라지면 인간이 만드는 세계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만으로 참의식에 완전히 이를 수 있는가?
여기에서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 근원에 도달하는 길을 넘어, 근원이 먼저 인간에게 다가오는 약속과 예언을 이야기한다.
11. 종교가 예언한 원의식과의 재연결
여러 종교는 인간이 수행하고 진리를 찾는 과정만을 말하지 않는다. 언젠가 감추어진 진리가 열리고, 인간과 근원의 관계가 회복되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는 약속도 전한다.
기독교에는 메시아와 하나님의 나라, 성령과 새 하늘 새 땅에 관한 예언이 있다.
불교에는 미래불과 미륵, 정법과 깨달음의 세계에 관한 가르침이 있다.
한국의 여러 민족종교에도 하늘의 뜻을 받아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인물과 후천개벽에 관한 예언이 전해진다.
이 예언들을 모두 같은 사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의 최종 목적이 인간과 근원의 만남, 의식과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로 향한다는 공통된 방향은 살펴볼 수 있다.
구원자는 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종교의 예언에서 구원과 깨달음의 길을 전하는 존재는 인간과 완전히 동떨어진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기독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 가운데 왔다고 설명한다. 예수는 육체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살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 함께한 존재로 이해된다.
불교의 붓다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고통의 현실을 경험하고 수행한 뒤 깨달음을 얻어 그 길을 가르쳤다. 미래불에 관한 가르침도 인간 세계와 무관한 추상적인 관념에만 머물지 않는다.
천봉의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단순히 한 인간의 외형이 아니다. 그 사람의 의식 안에 어떤 말씀과 진리가 임했으며, 무엇을 이루고 어떤 길을 제시하는가이다.
원의식은 눈에 보이는 물질처럼 직접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원의식의 뜻을 받아 실현하는 인간을 통해 역사와 현실 안에 드러날 수 있다.
미륵·메시아·정도령은 같은 존재인가
불교의 미륵, 기독교의 메시아, 한국 민족종교의 정도령을 이름이 비슷한 구원자라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존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각 종교의 경전과 역사, 예언의 배경과 구원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륵은 불교의 교리와 미래불 사상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메시아는 성경의 언약과 예언, 하나님 나라의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정도령과 후천개벽도 한국 종교문화의 원문과 역사적 배경을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천봉은 이들을 비교하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각 종교가 예고한 구원자는 인간을 무엇에서 구원하는가?
그는 어떤 진리를 가져오는가?
그 진리는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그 결과 인간과 근원의 관계는 어떻게 회복되는가?
이 기준으로 살펴보면 서로 다른 종교의 차이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종교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을 비교할 수 있다.
이 상세한 비교는 다음 장들에서 불교와 기독교, 여러 민족종교를 차례로 살펴보며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재연결은 공간의 이동인가, 의식의 변화인가
원의식과의 재연결은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우주의 어느 장소로 이동하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불교가 말하는 피안의 세계를 단순히 죽은 뒤 이동하는 물리적 장소로만 이해하면, 인간의 현재 의식과 삶의 변화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천봉은 재연결을 가의식에서 참의식으로 전환되는 사건으로 본다.
욕망과 거짓, 무지와 미움에 지배되던 의식이 진리와 생명, 사랑과 양심을 중심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속의 변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의식이 달라지면 인간이 보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현실도 달라진다.
원의식과의 만남은 내면의 사건인 동시에 인간이 만드는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는 창조의 출발점이 된다.
그렇다면 원의식과 다시 연결된 사람들이 만드는 세계는 지금의 세계와 어떻게 다를까?
12. 원의식과의 만남은 어떤 세계를 여는가
종교의 최종 목적이 원의식과의 재연결이라면 그 만남은 개인의 구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개인의 의식이 달라지면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다. 많은 사람의 의식이 달라지면 사회의 가치와 제도, 문화와 문명도 달라진다.
천봉의식장이론에서 새로운 세계는 하늘에서 완성된 물질세계가 갑자기 내려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원의식과 다시 연결된 인간들이 참의식으로 살아가며 새롭게 창조하는 현실을 뜻한다.
피안과 새 하늘 새 땅은 어디에 있는가
불교에서 피안은 무명과 집착,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를 가리킨다.
강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간다는 표현이 사용되지만, 그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공간을 이동한다는 뜻이 아니다. 중생의 의식에서 깨달음의 의식으로 건너가는 변화가 중심에 있다.
기독교의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하는 세계를 말한다. 그곳에서는 죽음과 애통, 고통이 사라지고 만물이 새롭게 된다고 기록한다.
두 종교의 교리와 종말론은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현재의 고통과 단절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근원의 관계가 회복되고 새로운 질서가 열린다는 희망을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다.
천봉은 이러한 세계를 가의식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참의식이 중심이 되는 현실로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새로운 세계는 누가 만드는가
새로운 세계는 한 사람의 주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원의식의 진리를 받은 사람은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해야 한다. 사랑을 말한다면 사랑으로 관계를 바꾸고, 생명을 말한다면 생명을 살리는 행동을 해야 한다.
각 개인의 의식이 달라질 때 가정과 공동체가 달라진다. 공동체가 달라질 때 정치와 경제, 교육과 문화의 방향도 달라질 수 있다.
지금의 물질문명은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 낸 결과다. 전쟁과 경쟁, 탐욕과 파괴도 인간 의식의 결과라면 평화와 협력, 생명과 조화의 세계 역시 변화된 의식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새 하늘 새 땅과 피안의 세계는 인간의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관념만은 아니다.
참의식을 회복한 인간들이 살아가며 펼쳐야 할 새로운 현실이기도 하다.
절대지는 모든 것을 안다는 뜻인가
종교는 궁극적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진리를 온전히 아는 상태를 이야기한다.
불교에서 붓다는 무명을 깨뜨리고 진리를 깨달은 존재로 이해된다. 기독교도 진리의 성령이 인간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는 때를 말한다.
천봉은 이를 원의식과의 만남을 통해 가의식의 제한을 넘어서는 과정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절대지에 이른다는 말을 한 개인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소유하고 어떤 판단도 틀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쉽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참된 앎은 자신을 높이는 지식이 아니라 생명과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실천하는 의식이어야 한다.
원의식과의 만남이 참된 것이라면 그 결과는 더 큰 교만과 지배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을 존중하고 거짓을 버리며, 분열된 인간을 다시 연결하는 방향으로 나타나야 한다.
종교의 예언이 가리키는 새로운 세계도 인간의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는 곳만을 뜻하지 않는다.
가의식이 참의식으로 바뀌고, 단절된 인간이 원의식과 다시 연결되며, 그 의식으로 인간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시대를 뜻한다.

에필로그|종교의 목적은 믿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연결의 회복이다
종교는 인간이 만들었는가, 아니면 원의식에서 왔는가?
이 질문에 하나의 짧은 문장으로 답하기는 어렵다.
종교의 언어와 제도, 의례와 조직은 인간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만들어졌다. 인간은 두려움과 죽음, 공동체의 질서와 삶의 의미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인간이 왜 생존을 넘어 영원과 진리, 깨달음과 구원을 물어왔는지는 여전히 남는 문제다.
천봉의식장이론은 종교에 외적인 기원과 내적인 기원이 함께 있다고 본다.
외적인 종교는 인간이 만들었다.
내적인 종교는 인간의 의식이 자신의 근원인 원의식을 찾으려는 요청에서 시작되었다.
종교는 인간의 몸만을 다루지 않는다. 의식과 마음, 정신과 영혼을 다루며 인간이 현재의 상태에서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을 말한다. 불교는 무명과 집착을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여러 종교도 진리와 구원, 새로운 시대에 관한 약속을 전한다.
그 교리들은 서로 다르며, 차이를 무시한 채 모두 같은 종교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인간이 지금의 욕망과 무지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근원적인 진리를 만나 의식이 변화해야 한다는 공통된 질문은 발견할 수 있다.
천봉이 말하는 종교의 목적은 인간이 외부의 신을 상상하여 새로운 우상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가의식에 갇힌 인간이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참의식을 회복하여 원의식과 다시 연결되는 데 있다.
그 재연결은 경전을 많이 읽었다는 주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시라고 주장되는 말도 예언과 성취, 증거와 경험을 통해 분별되어야 한다.
진리를 받았다는 사람의 의식과 삶도 그가 맺는 열매를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의식의 문제는 남는다.
무의식적인 물질에서 어떻게 주관적 경험과 자아, 사랑과 양심, 의미와 진리를 판단하는 의식이 나타났는가?
신을 믿는 사람에게도 과제가 남는다.
그가 믿는 신과 진리는 그의 의식과 삶을 실제로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종교의 목적은 믿음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단절된 인간이 근원을 다시 발견하고, 거짓에서 진실로, 욕망에서 생명으로, 가의식에서 참의식으로 돌아가는 데서 완성된다.
그리고 원의식과 다시 연결된 인간은 이전과 같은 세계를 만들 수 없다.
그의 의식이 달라지면 그가 바라보는 세계가 달라진다. 관계가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며, 마침내 인간이 함께 만드는 현실도 달라진다.
종교의 최종 목적은 인간을 현실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참의식으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다음 장부터는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여러 종교가 인간의 단절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떤 구원과 깨달음의 길을 제시했는지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영상으로 이어서 탐구하기
종교는 왜 생겨났을까요?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만든 문화일까요, 아니면 원의식이 인간을 통해 전한 계시에서 시작된 것일까요?
그리고 종교의 최종 목적은 외부의 신을 섬기는 데 있을까요, 아니면 가의식에서 참의식으로 회복되어 원의식과 다시 연결되는 데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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